비디오를 너무 많이 본 청소년 6
‘최인호 원작, 배창호 감독, 안성기 주연’
<고래사냥(1984)>에 이어 환상의 삼인조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걸작 <깊고 푸른 밤(1985)>은 제목에서 주는 신비로운 느낌부터 압도적인 영화였다. 하지만 ‘어른 영화’ <깊고 푸른 밤>이 극장에서 개봉했을 당시 나는 10대 초반 어린이였기에, 아무리 보호자를 동반한다고 해도 감히 극장을 찾아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고, 또한 내 주변의 어떤 어른도 나를 데리고 극장 구경을 가줄 리도 만무했다.
몇 년이 지나 중학생이 된 나는, 어쩌면 내 유년 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을, ‘나 상가’ 비디오 가게 사장님 덕분에 드디어 그 유명한 영화 <깊고 푸른 밤>을 보게 되었다. 내 기억에 당시 내 또래 중에서 이 영화의 존재를 아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나의 당시 영화 취향은 깊고도 푸르렀다. 거기에 이름만 들어봤지 아직 그 땅을 밟아볼 기회가 없었던 미국 현지 올 로케이션이라니! 영화 <깊고 푸른 밤>은 왠지 ‘꿈의 영화’인 듯싶었다.
영화 <깊고 푸른 밤>을 간절히 보고 싶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장미희 배우였다. ‘봄에도 우린 겨울을 말했죠, 우리들의 겨울은 봄 속에도 남아있다고’로 시작하는 김세화, 이영식의 듀엣곡 ‘겨울 이야기’가 울려 퍼지던 영화 <겨울 여자>를 본 어린이는 장미희 배우에게 반해버렸고, 당시 ‘장미희-유지인-정윤희’로 완성된 2대 트로이카 중 누가 제일 좋으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장미희!’를 외쳤던 확고한 취향을 한동안 만천하에 과시했었다.
영화 <깊고 푸른 밤>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 생생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한동안 내 뇌리에 안성기-장미희, 두 배우를 ‘영화배우’의 대명사처럼 기억하게 해 준 영화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장미희 배우는 <겨울 여자>에서 봤던 ‘이화’와는 전혀 다른 인물 ‘제인’ 그 자체였고, 안성기 배우는 <고래사냥>에서 각설이 타령을 멋들어지게 불러 젖히던 ‘민우’와는 180도 다른 인물 ‘백호빈’이었기에, 그렇게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두 배우를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문화충격’이었다.
교과서에서나 봤지, 실체(?)에 대해선 알지 못했던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저렇게 발버둥을 치는 제인과 호빈의 모습은 처연하기까지 했으며, ‘결혼’이라는 개념도 확고하게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위장결혼’을 주입하기엔 당시 내 뇌 용량은 버겁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흘러, 내 뇌 용량이 어느 정도 그 개념을 받아들일 만하게 되었고, 어른이 된 후 다시 본 <깊고 푸른 밤> 속 두 인물의 비극적인 결말이 몸서리쳐질 정도로 안타까웠다.
‘위장결혼’을 소재로 한 다른 영화로는, 몇 년 후 극장에서 당당하게 관람했던, 제라르 드파르디유, 앤디 맥도웰 주연의 <그린카드(1991)>와 비교하며 보기에 적절하고, ‘아메리칸드림’ 쪽이라면 나영희, 진영미 주연의 <천국의 땅(1990)>이나 김지미, 신성일, 길용우, 이보희 주연의 <아메리카 아메리카(1988)>와 비교해 봐도 재미있다.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2022년 7월 30일 발간한《아카이브 프리즘 #9 Summer 2022 "리와인드 - 비디오 시대의 어휘들》에 기고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