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럴 수가.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하고 나서 반신반의하고 있었지만, 그 결과를 보고 나자 안 그래도 심란한 요즘, 여러 감정이 밀려 들어왔다. 작가라고 명함을 내밀기에 부끄러움이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릴 적부터 글쓰기 하나에 자신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데 떨어졌다는 메일을 보고 나자,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이 더 어지러워져 버렸다.
요즘의 나는 글쓰기에 매우 목말라 있었다. 그래서 아기를 재우고 난 한밤중, 브런치에 대해서 알고 나자마자 허겁지겁 작가 신청을 하기에 바빴고, 그런 나 자신도 그 결과에 자신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러니까 나는 ‘나 자신’에 목말라 있었다고 보면 된다. 그 말의 뜻은 출산 후 글쓰기를 쉬면서 너무나도 복귀를 꿈꾸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나는 절실했다.
글을 쓰는 것이 절실한 이유에 대해서는 앞으로 브런치에 글쓰기를 하면서 이야기해 나가도록 할 것이다.
다시 돌아와.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그나마 아기가 어느 정도 자란 때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요즘의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동동대고 있었다. 아무리 아기가 어린이집에 적응을 마치고 조금씩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고는 하나, 육아와 살림 속에 허덕이며 예전처럼 작품 속에 몰두한다는 것은 정말로 쉽지가 않은 일이었다. 마치 내 머릿속의 모든 감성과 아이디어가 지독한 가뭄을 맞이한 듯이 말라버린 듯했다.
그것은 나를 견딜 수 없게 했다. ‘엄마’와 ‘아내’라는 정체성 이전에 나는 ‘작가’의 꿈을 꾸던 사람이었고, 그것은 내 삶의 한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더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니, 나는 다소 깊은 절망감을 맛보고 있었다.
이 이전의 고민은, 작품 활동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의 선택이었다면, 이제는 글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마치,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처럼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좀 더 솔직해지고 좀 더 용기를 내보기로 하였다. 앞으로 나는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상처와 그것이 작품 활동을 하면서 또 아이를 키워내면서 그리고 나 자신이 살아가면서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것이 이 글을 읽는 이들과 내가 사랑하는 이들, 결국엔 나 자신도 치유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