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좋은 사람일까 나쁜 놈일까?
하루하루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와중에도 개개인은 여러 상황을 맞닥뜨린다.
수많은 인파가 몰아치는 대중교통에 탑승한다거나,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거나, 식당에서 점심을 주문했더니 짠 음식이 나왔다거나 하는 상황들 말이다.
여기서 수많은, 뜨거운, 짠 이라는 형용사적 표현들은 개개인에게 있어서 상대적일 수 있으며 주관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철수가 어제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철수가 오늘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어제 마신 커피와 오늘 마신 커피의 온도는 동일하다.)
같은 온도의 커피일지라도 어제 커피를 마시기 전에 철수가 격렬한 운동을 했다면 뜨겁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갑자기 감기몸살에 걸린 철수에게는 어제와 같은 온도의 커피일지라도 따뜻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객관적인 상황(커피의 온도)에 놓여있더라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한다.
자기 자신조차도 동일한 상황 앞에서 주관을 나타내는데 하물며 사람 대 사람의 상황이라면 상대성의 편차는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엄마가 깨끗하게 청소해 놓으라고 해서 제 딴에는 아무리 열심히 청소할지라도 엄마가 생각하는 깨끗함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사소한 상황들조차 우리는 자각하지 못할 뿐 실시간으로 상대적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상대성은 가히 객관성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역사에는 전혀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그에 대한 해석과 의견에 있어 대립하는 상황들을 자주 목격한다.
항상 순탄한 합의만 이루어진다면 이는 사회주의를 가장한 독재체제를 제외한다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역사를 기술하는 역사학자들은 과연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할까?
100% 객관적으로 남기기란 절대 불가능하다.
임진왜란에 대해 기록한 한국 역사학자와 일본 역사학자의 내용은 동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국에 대한 스토리텔링 방식 자체가 서로 다를 것이다.
설령 기록이 같다고 가정할지라도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는 이순신 장군은 좋은 쪽보다는 나쁜 쪽으로 비중이 많이 실릴 것이다.
열 명의 사람이 같을 하늘을 올려본다 할지라도 절대 같은 시각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라는 것 자체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상황이나 사건을 두고 자신이 견해만을 참으로 취급하고 상대의 견해를 무작정 배척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정치판뿐만이 아니라 온라인이나 SNS를 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극히 객관적이라고 생각되는 역사조차도 100% 객관성을 나타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견해차가 발생한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고 살아간다면 지금보다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여기서의 '좋은'이라는 기준은 내 기준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