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도 관객인가.’
그래서 저렇게 뛰어가는 걸까.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남자가 사라진 계단을 바라봤다. 아무렇지 않게 들어간 걸로 봐서 괜찮은 거 같은데. 정말 위험했다면 성큼거리지 못했을 거 아닌가. 좀 더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발까지 젖었는데 가보자.
그렇게 도착한 실내는 생각보다 괜찮… 키는 커녕 역시나 살벌했다. 안쪽 깊숙한 곳에서 먹물을 풀어내 듯 어두웠으며, 의자는 개미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니까. 무대는 좁고 조명장치도 조악했다. 그리고...
'물이 새?'
천장에서 무대 위로 빗물이 톡톡 떨어지고 있었다.
'대체 여긴.....'
대걸레질하는 스텝을 보다 몸을 돌렸다. 그래, 누렇고 칙칙한 침대에서 일어나 지옥철을 타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선방한 거야. 그렇고 말고. 그렇게 날 위무하며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예상치 못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
스텝이 낯이 익었다. 대걸레질하는 남자... 방금 부딪쳤던 사람 같았다. 관객인 줄 알았는데 스텝이었던가. 두꺼운 우의를 입고 있어서 몰랐는데 확실했다. 그러고 보니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 전 매표소를 향해 뭐라뭐라 외쳤던 모습이 떠올랐다.
'갈게요, 였나? 포스터 다 붙였어요?'
비오는 날 포스터도 붙이고 여기와서 대걸레질도 한다고?
열심히 청소를 하는 청년의 이마에서 뚝뚝 땀이 떨어졌다. 초점이 서 있는 눈초리도 열정으로 뜨거웠다.
'...고생하네. 포스터에 청소까지. 보수는 얼마나 받을까. 최저시급은 받나. 연극판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좋아서 한다던데.'
그러는 동안, 빗물은 멈춰 있었다. 무대에 고여 있던 물웅덩이도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청소를 마치고 나가는 청년을 보자니 내 생각이 났다. 그래, 나도 저랬었지. 온갖 공모전에 떨어져서 식음을 전폐하고 있지만 처음 작가가 되고 싶단 꿈을 품었을 땐 청년처럼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었다. 내가 만든 세상이 좋아. 내가 만든 인물이 좋아. 잠겨 죽어도 좋으니 그 세계 속에서 영원히 유영하고 싶어.
'…….'
그 말은 즉, 청년 또한 나처럼 5년 내에… 아니, 잘 버티면 10년 안으로 폐인이 될 거란 뜻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관두는 게 낫지 않을까. 더 상처받기 전에. 꿈만 쫓기엔 풍진 세상이니까.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알 수도 없고.
그러나 청년의 눈빛이 자꾸만 맘에 걸렸다. 바깥에서 마주쳤을 때나 여기서 걸레질을 하고 있을 때, 청년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현실에 발 딛고 있지만 현실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미래를 보고 있었다. 더 나아가 희망을. 그건 꿈을 품었을 때 내가 했던 눈과 비슷했다.
씁쓸한 상념을 더듬는 사이, 출입문이 닫혔다. 연극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나가는 타이밍을 놓친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 뭐... 괜찮겠지. 너무 걱정 말자며 무대로 시선을 돌리자 조명이 스포트라이트를 내려주고 있었다. 무대 밖에서 아내 역할의 배우가 나왔다. 하얀 얼굴에 긴 머리... 이쁘네. 뒤이어 남편 역할의 배우도 나왔다. 남자 배우도 여자 배우처럼 멋지... 순간, 다시 의아해졌다.
‘또?’
청년이었다. 무대를 청소했던.
'스텝이 아니라 배우였어?'
아니, 스텝 겸 배우인가. 멀티태스킹..?
의아해하는 동안 연극은 시작됐다. 가난한 집, 단란한 신혼 부부.. 개그맨을 꿈꾸는 남편과 그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에 대한 이야기... 평범한 내용이었지만 신경이 곤두섰다. 청년 때문이었다. 연기하는 내내 빛나는 두 눈이 날 떠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기승전결 중 전 부분이었다. 개그맨 역할을 하는 남편 역할을 하는 청년이 관객 참여를 유도했다.
“저는 슬랩스틱을 하는 개그맨입니다. 체력은 타고 났죠. 있는 힘껏 제 정강이를 차보세요. 무쇠같은 다리가 꿈쩍도 안 할 걸요?”
개그맨으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하고자 호기를 부리는 부분이었다. 동시에 실제 관객을 참여시키는 장치이기도 했다. 청년에 의해 무대에 올라간 남자 관객이 머뭇거렸다.
“그래도…….”
“괜찮다니까요?”
해보세요, 얼른요. 뒷 말에 좀 더 망설이던 남자 관객이 청년의 청강이를 찼다. 뻐억, 하는 뼈 소리가 공간을 갈랐다. 청년도 이 정도의 타격은 예상치 못했는지 허억, 하며 몸을 구부렸다. 관객석에서 어머.. 하는 탄식이 터졌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란다고 진짜 하냐.’
남자 관객도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아… 하며 청년의 상태를 살폈다.
“죄송합니다… 저는 하라고 하셔서…….”
“흐윽…….”
“마, 많이 아프세요?”
“아닙니다… 제, 제가 죽으면..."
"네?"
"제가 죽으면 아내에게 전해주세요. 슬랩스틱을 하다가 죽었다고요.”
청년이 철푸덕 쓰러졌다. 남자 관객이 의아해하는 사이, 관객석에서 안도의 웃음이 터졌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야, 진짜로 아픈 게 아니었어? 극 중 역할에 몰입한 거야? 청년 또한 구부렸던 몸을 펴며 씩 웃었다.
"실은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이까짓 걸로 아프다면 슬랩스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강철이라고.”
청년이 가슴을 두드렸다.
“어떠세요, 이제 제 말씀이 좀 믿겨지시죠?"
“허…….”
"저를 기억해주세요. 유명한 개그맨이 될 테니까요."
헛웃음을 짓던 남자 관객이 내려갔다. 그 후로도 더욱 호기를 부리던 청년... 아니, 남편은 결국 개그맨으로 성공해서 유명세를 얻었다. 아내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지만 아름다웠던 미소를 떠올리며 마지막 장면에서 남편은 말한다.
"아내는 당부했습니다. 제가 훌륭한 개그맨이 되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면 좋겠다고. 저는 그 유지를 따를 작정입니다."
나는 그 말이 청년 자신의 말로 들렸다. 저는 개그맨 역할을 하는 남편 역할을 하는 배우 지망생입니다. 저는 여기서 포스터도 붙이고, 무대도 청소하며, 연기도 합니다. 제 꿈은 훌륭한 배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습니다.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나로하여금 청년 자신인지 극 중 인물인지 헷갈릴 정도로 몰입하게 했다면 자질이 있단 뜻이 아닐까. 꿈을 이어나가도 된다고.
잠시 뒤, 연극이 끝났다. 배우들은 끝나도 자리를 뜨지 않고 몇 안 되는 관객에게 인사해주었다. 나 또한 마지막까지 앉아 있다가 배우들이 퇴장할 때 일어서는데, 다리를 절룩이는 청년을 봤다. 남자 관객에게 맞은 왼쪽 다리를 끌며 본인이 대걸레질을 했던 무대 밖으로 나갔다. 극이 한창일 땐 아파도 내색하지 않더니 막이 내리자마자 고통스러워하는 듯했다. 나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다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까무룩했던 하늘도 갠 것 같았다. 비춰오는 햇볕이 갱도 같던 계단 위로 은은한 빛을 뿌려주고 있었다.
톡톡. 나는 우산 끝을 땅에 찍으며 청년을 되새겼다. 좋은 배우가 되길. 연극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어디서든 다시 볼 수 있길. 그리고 나 또한 그의 이름 옆에 나란히 등재되는 작가가 될 수 있길. 그의 절룩이는 다리를 떠올리며 멈춰 있던 다리를 힘차게 내질렀다. 바람이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