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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노 Jul 01. 2022

회사 아닌 내 것을 만들고 싶습니다

제품을 만드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나 하는 소리니?


 대부분의 동기들이 공무원, 공기업 시험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나는 학과 수업에도 공무원, 공기업에도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가방에 지금 학과와는 아무 상관없는 공기업 기출문제집을 꽉꽉 채워넣고 도서관으로 향하던 친구놈에게 "넌 그게 재밌냐?" 라며 물으면 "꼭 흥미가 있어야만 하는 거냐?쉐끼야?" 라며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그 놈은 그 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나 모르겠다. 아직 연락하고 지내는 이 놈은 목표한대로 공기업에 합격하여 잘 살고 있다. 난 놀 생각뿐이었다. 그렇다고 뭐 쌈빡하게 놀 줄 아는 것도 아니었다. 뜨듯미지근하게 시간을 보냈다. 재미가 없었다. 뭔가 남들과 다른 가치관이 있어서 그런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알바가 있으면 용돈을 벌었고 소개팅건이 있으면 쫄레쫄레 따라 나가서 놀았다.



 군 제대하고 복학 후, 그러니까 서기(?) 2000년 6월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전공 수업을 듣던 때였다. 쥬라기 공원의 말콤박사처럼 생긴 시간강사가 여러개의 LED가 박혀있는 도트매트릭스라고 하는 보드를 들고 수업에 들어왔다. Z80이라는 마이크로칩에 프로그래밍해서 원하는 글자와 그림을 움직이도록 하는 수업이었다. 너무 재밌었다. 세상 재밌었다. 처음으로 도서관가서 영어원서를 빌려 공부를 했다. 누가 시킨것도 시험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 때의 내가 스티브잡스의 두뇌를 가졌더라면 나의 가공할 노력과 더불어 세상을 바꿀만한 엔지니어가 되었을거다. 하지만 뭐, 난 지극히 평범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어서 가공할 노력이 더해져 지금과 같이 살고 있다. 너무나 평범했기에 가공할 노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지 끔찍하다.



결이고운가의 정원


개발자로서의 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 바로 그 때였다. 그 때 아드레날린의 내음은 여전히 기억날 것처럼 강렬했다. 어셈블리어부터 시작해서 C언어를 독학하고 자바언어를 공부했다. 각종 로봇대회에 나갈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가다를 뛰고 돈을 모았다. 물론 대회에서 상위권에 랭크될만큼 뛰어난 두뇌를 소유하진 못했다. 하지만 너무 재밌었다. 실현가능한 생각들을 나의 코드로 모두 표현할 수 있었다. 



 한국기계연구원 자기부상열차개발팀에서 위촉연구원을 구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3학년이었던 나는 이곳에서 월급을 받으며 개발일을 시작했다. 박사님이 부상제어 알고리즘을 고안하면 DSP에 코드로 구현하는 것이 나의 업무였다. 세상 이렇게 재미날 수가 없었다. 너무 재밌어서 학교수업에도 안 들어가고 48시간동안 잠을 안자고 일하다가 엄마가 200만원에 사준 액센트를 탄채 신호대기중에 졸다 앞차를 들이받은적도 있었다. 서기 2000년 9월이었다. 개발자로서의 삶은 2020년 9월까지 이어졌다. 



 이 나라, 저 나라 출장을 다니며 여러 제품을 생산하는데 개발자로서의 역할을 하며 살아왔다. 여느 직장인이 그렇듯 뼈를 갈아넣으며 제품생산에 기여를 하여도 내 이름은 기억되지 않았다. 나의 뼛가루가 들어간 제품을 팔아 얻은 수익에 월급을 제외한 나의 몫은 없었다. 나의 100을 갈아 넣어도 10을 갈아 넣어도 월급은 같았다. 나의 몸이 상하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팽배해져갔다. 적당히 일하고 눈치보며 시간을 보내는데에 익숙해져갔다. 무료함을 느끼는 날들이 늘어갔다. 한번 쯤은 나의 제품을 만드는 데에 모든 노력을 쏟아붓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제품을 팔아 수익이 크게 나지 않더라도 나의 것을 만들고 싶었다. 



 2020년 9월, 나는 회사를 완전히 그만두었다.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완전히 마무리짓고 양평에서 너나코 코딩클래스를 시작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적당한 시간을 들이고 그에 맞는 적당한 수입을 얻으며 살고 있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개발자로서의 시선이 흐려져 거의 보이지 않을때 쯤이었다. 중국에서 수입해 온 여러가지 전자기기들을 팔아 사업하는 친구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내가 얼마전에 우리 '보름이' 교육하러 반려견 훈련소에 다녀왔거든"


"거기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만들어서 팔면 괜찮을거 같어"


"니가 만들고 내가 파는거야"


"그러니까 우리 제품을 만드는거지"



나는 친구놈의 아이디어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집 마당개, 여름이


"내 것을 만든다고?"



 회사 것을 만들던 시절, 머나먼 타국에서 쌍코피 터져가며 일을 마무리하고 본사로 양산 소프트웨어가 담긴 이메일 전송버튼을 누르고 나면 예상외로 해냈다는 희열의 감정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었다. 이후 이어지는 공허함과 알수없는 찝찝함만이 오랫동안 이어졌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희열의 이면에는 회사 아닌 내 것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내 것을 만들다니?' 꿈만 같았다. 


 친구놈의 말을 듣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장미빛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푸른창공을 향해 날아다닌다. 무슨제품인지도 모른채 말이다. 제품을 만드는 것이 얼마만큼 어려운지도 모른채 말이다.



친구놈은 설명을 이어갔다.



"반려견 훈련기를 만드는거야. 다시말하면 소리 둔감화 훈련기."


"반려견 훈련소를 찾는 많은 견주들이 아파트에 산다고 하더라구. 그런데 누군가 와서 벨을 누르면 벨소리에 미친듯이 짖는 문제로 힘들어 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훈련기를 만드는거지."



 반려견 훈련사들은 클릭커라는 것을 사용한다. 훈련에 잘 따르는 반려견에 대한 보상을 할때 훈련사들은 클릭커로 "딸깍" 소리를 내며 간식보상을 한다. 클릭커훈련은 '조건반사'를 활용한 훈련이다. 반려견이 견주가 원하는 행동을 보여주는 순간, "딸깍" 클릭 소리를 들으면 '간식/보상' 이 온다는 것을 반려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친구놈은 이와 유사하게 벨소리를 담은 전자식클릭커와 간식보상기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이미 몇몇 훈련소에 방문하여 전문훈련사의 의견을 들어본 후였다. 훈련사들은 효과가 있을것이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아파트에 사는 반려견주가 늘어가고 있다. 사회적 문제의 범주에 반려견소음으로 인한 층간소음이 포함된지 오래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 우리만 하고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품이 셀 수 없이 많을 것만 같았다. 여기저기 검색을 해보니 생각만큼은 없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 유사제품을 구글에서 검색해 보았지만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아니 왜 없지?'


'왜 없는거지???'


'훈련사도 효과가 있을거라는데, 왜 없는거지?'


'만드는것이 보기에는 쉽지만, 실제로는 어려운건가?' 


'제조비용이 너무 많이 드나?'


'이미 다 해보고 망해서 없는건가?'


'아!!!! 왜 없는거지?'



우리는 이유를 알아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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