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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슬 Dec 30. 2020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디스인챈트, 밀레니얼 경험을 잇다


다섯 살 터울 위의 언니가 있던 나는, 동화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이렇다. 언니가 읽어주는 내용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쁜 그림들에 홀려 듣던 나이 정도 되었겠다. 하루는 언니에게 물어보았다. "언니, 옛날옛적에가 무슨 뜻이야?" 언니 답변은 기억나지 않는다.


'옛날 옛적에' 뜻을 물어본 나는 꽤 궁금했던 것 같다. 무슨 내용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왜 모든 동화책에는 저 말로 시작할까?라는 이면의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그만큼 우리가 읽던 동화책에는 클리셰라고 할 정도의 반복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옛날 옛적에, 누군가가 살고 있었고 위기가 생긴다. 그리고 고난과 시련을 뚫고 나서 결굴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올해 들어서 넷플릭스 알고리즘을 몸소 경험했던 적이 있다. 넷플릭스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됐을 무렵, 어떤 컨텐츠들이 있는지 잘 몰랐을 때였다. 미국 컨텐츠들은 대표적인 것 몇 개만 보고 있었을 때였고 그 순간 심슨가족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때 자극적인 유머로 즐거움을 주었던 심슨가족은 시즌 19, 20 정도까지 보고 중간에 멈췄었던 상황이었다. 검색 창에 심슨가족을 입력했는데 리스트에 보이지 않았다. 아쉬웠다. 그 대신 심슨가족 그림체와 매우 유사한 컨텐츠가 눈에 띄었다. 디스인챈트였다.



원작의 이름은 Disenchantment로 디스인챈트먼트라고 해야지 맞다. 한국에 들여올 때에는 동사형인 '디스인챈트'로 짧게 명명했는데 이 부분은 잘한 것 같다. '각성'이라는 뜻이다.


최근 영화나 TV 시리즈 중에 고전적인 스토리 플롯을 깨고자 하는 시도가 보이는 것들이 많다. 디스인챈트도 그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공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본 TV 시리즈는 다른 비슷한 배경의 컨텐츠와 느낌이 사뭇 다르다. 특히 공주 시리즈로 유명한 디즈니와 비교하여 생각하면 그 차이가 더 크다.

공주인 빈은 대조적인 인상은 주는 엘프와 악마와 함께 모험을 떠난다. 공주는 술쟁이며, 엘프는 바보 같을 정도로 순박하고 악마는 말 그래도 정말 악해 보인다. 빈 공주는 거친 말버릇은 물론 물론 실리를 위해서는 나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충격적이고 파격적이다. 에피소드 하나하나 별로 작게 보면 별개의 이야기를 가졌지만 시즌의 마지막에 가서는 약간의 소름 돋는 대서사가 기다리고 있다.



그림체에서 알 수 있다시피 미국 시트콤의 대표작인 심슨가족 제작진이 만들어낸 최근 작품이다. 퓨처라마 또한 시트콤계에서 인정을 받았었는데 디스인챈트는 이 둘 사이에 위치한 것 같다. 풍자적 메시지로 보나, 개그감으로 보나 그렇다. 판타지 중세시대인 드림랜드를 배경으로 이 삼총사는 무언가를 위해 계속 모험을 떠난다. 사건 사고도 빼곡하게 일어난다. 가끔 기괴하고 잔혹한 장면도 등장한다. 재밌는 점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흘러가는 심슨 가족과는 달리 스토리가 있다. 복선도 꽤 흥미롭게 숨겨 놓아서 시즌 마지막에 가서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심슨가족도 이렇고 디스인챈트의 개그코드가 너무 잘 맞아서 한편 한편마다 킬링타임이었다. 특히 고된 하루를 보내고 "아휴 정말 고달픈 하루였다 침대에 가서 쉬어야지"가 아닌 "젠장, 빨리 술집 가서 술 한잔 하자고"를 뱉으며 터덜터덜 걸어가는 빈 공주는 이 시트콤에서 내 최애로 자리 잡았다. 처음엔 가볍게 보았으나 사뭇 탄탄한 이야기 전개가 나를 더 빠지게 만든 것 같다. 시즌 1과 2를 금방 몰아보고 현재는 3을 기다리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존 프레임에서 많이 벗어나서 예상 밖의 상황을 이어가는 것이 정말 재밌었다. 옛날 동화책처럼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는 결말로 마무리되지 않아도 역동적인 삶의 과정를 보여주는 신랄한 시트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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