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생산성 _마이클 하얏트 지음 (정아영 옮김)
일이 늘었다. 점점 일이 늘어나고 있다. 처음에는 할 줄 몰라서, 내 업무가 아니어서 모른 체했던 일들이 어느새 내 담당으로 자리 잡았다. 그럴수록 지쳐갔다. 일이 많아진 것은 직장 내에서 내 영향 범위가 그만큼 넓어진 것이니 좋게 생각하라는 부장의 말도 귓등으로 튕겨냈다. 성과는 팀장이 차지하고, 일은 팀원이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이 늘어날수록, 나는 내가 마치 재주를 부리는 곰처럼, 기계장치를 움직이는 부속처럼 하찮게 느껴졌다.
나는 얼마 전 첫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입사 당시 열정은 이미 식은 지 오래였다. 식다 못해 얼어버린 듯 보람도, 성과도 느끼지 못했다. 흙먼지 날리는 건설 현장이 싫었다. 아무 계획도 없이 도망치듯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적어도 현장으로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호기는 열정보다 빠르게 식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있었다. 가장의 책임에는 돈이 꼭 필요했다. 사표를 내고 딱 3개월 만에 일할 곳을 찾아야만 했다. 몇 차례 거절을 겪고 나니 절박해졌다. 어디라도 좋으니, 다시 일할 수 있게만 해달라고 기도했다. 송충이는 다시 솔잎으로 찾아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지만, 자괴감은 자본주의를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동종 계열의 회사에 문을 두드렸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눈높이를 낮추고 또 낮췄다. 각고의 노력 끝에 겨우 이직할 수 있었다. 이직은 쉽지 않았다. 고액의 웃돈을 주며 모셔가는 건 나에게 그저 드라마 속 얘기일 뿐이었다. 나는 아직 주인공은 아니었나 보다.
내가 이직한 회사는 전에 다니던 회사보다 규모가 작았다. 규모가 작다고 해야 하는 일이 적다는 의미는 아니다. 작은 회사일수록 오히려 한 사람이 맡아야 할 일의 가짓수는 훨씬 다양하다. 더구나 경영진이 대기업과 같은 수준의 결과를 원한다면, 일은 당연히 고될 수밖에 없다. 제대로 갖춰진 업무지침서도, 가르쳐 줄 사람도, 딱히 자신의 업무를 대체할 사람도 없기에 일이 몰리는 날에는 야근이 허다했다.
일이 늘어갈수록, 삶은 쪼그라들었다. 그나마 총기가 넘쳤던 이직자의 눈빛은 어느새 흐릿해졌고, 생기 넘치던 걸음걸이도 무거워져만 갔다. 삶은 퍽퍽해졌다. 직원들은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며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모두들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다는 말만 반복할 뿐, 그 누구도 쉽게 떠나지 못했다. 행복하려고 일하는 게 아니라, 일하려고 행복을 미뤄야 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삶은 푸석거렸다. 물기가 모두 말라버린 논바닥처럼 굵은 상처를 내며 갈라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그때, 멈춰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삶은 계속되어야 했고, 먹고살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한 집안을 책임져야만 했던 나는 오히려, 더 많은 월급이 필요했고, 더 빨리 승진하고 싶을 뿐이었다. 더 많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을 더 많이 하면 정말로 죽을 것 같았지만, 주어진 일을 모른 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놀라운 성과를 보여준 것도 아니었다. 야근은 점점 늘어만 갔고, 가족과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일을 거절하지 못한 나는 가족을 외면한 셈이었다. 일이 추가로 주어지면 그게 나를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절하지 못했다. 마치, 독이든 사탕을 넙죽 받아먹은 것처럼, 삼키지도, 뱉어내지도 못한 채 그저 목구멍에 간신히 걸쳐둔 것 같았다.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무력한 나날이 계속되면서 미루는 일이 많았다. 일을 미뤘고, 행복을 미뤘다.
그럴수록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더 이상 행복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을까? 나는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걸까? 어떻게 해야 이 고통을 끝낼 수 있을까? 복잡한 출퇴근 시간,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인처럼 생각이 많아졌다. 더 이상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 미루기도, 고통도, 심지어 삶까지도. 당시에는 직장을 끝내는 것을 넘어 차라리 삶을 끝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고민은 언제나 큰 놈이 이긴다. 큰 고민은 작은 고민을 잡아먹는 것 같다. 죽음을 고민하니, 삶의 마지막을 각오하니, 일 따위는 너무나 하찮게 여겨졌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나는 자는 척했던 그동안의 삶을 끝내고 싶었다. 조용한 새벽, 나는 책상에 앉았다. 그동안의 고민에 대한 질문과 답을 써 내려가 가기 시작했다. 한숨과 의욕이 교차하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떠날 곳도, 떠날 수도 없었다. 그저 일어나기만 하면 되는데, 의자는 마치 나를 꽁꽁 묶어둔 것 같았다. 나는 새벽의 적막함으로 도망쳤다. 다행히 새벽은 나를 품어주었다. 그날 이후 힘들 때면 나는 이따금씩 새벽의 고요함을 찾았다.
그러다 문득, 이왕 죽을 거라면 어떻게 죽어야 숭고하게 죽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두고 먼저 떠나야 한다면, 그럴싸한 명분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석박사도 아니고, 전문 자격증도 하나 없는 그저 그런 작은 회사에서 일만 하다 생을 마감하기는 싫었다. 그때였을까? 나는 오히려 열심히 살기로 다짐했다. 죽을 듯이 열심히 살다가 죽는다면, 죽고 싶었으니, 원하는 바이고, 죽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결론이었다. 더 일에 매달렸다. 더 공부에 매달렸다. ‘더 생산적인 삶을 살겠노라.’ 다짐하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유의 이유를 캐물었고, 방법의 방법을 찾아 나섰다. 지금의 상황을 돌아보고, 나를 돌아봤다. 일기를 썼다. 사소한 것이라도 칭찬을 하고, 감사를 하기 시작했다. 반성하며 내일을 계획했다. 독서와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으리라. 시간을 쪼개어가며 운동을 했고, 미뤄뒀던 수술도 받았다. 건강해지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좀 더 강해지고 싶었다. 몸도 마음도 말이다. 업무와 육아, 가사. 수많은 의무들 속에서 나를 구원해 준 것은 새벽이었다. 새벽 시간을 위해 술을 줄이고, 잠의 질을 높였다. 완벽한 하루를 계획하고 실천하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어차피 지금이 삶의 마지막이라면 죽기 전에 '뭐라도 이뤄내야만 한다.'라는 생각뿐이었다. 위인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를 기억할 사람들에게 내 자랑거리 한 개쯤은 남겨주고 싶었다. 오늘 죽기에는 내가 이뤄낸 것이 너무 부족해 보였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생각하니, 삶이 간절했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나는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라는 생각으로 나를 채찍질했다.
일을 늘렸다. 더 달라고 했다. 기존의 일도 버거울 정도였지만, 이왕이면 더 중요한 일을 맡아보고 싶었다. 팀장급이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발이라도 담가보고 싶었다. 간단한 자료조사부터 자원했다. 지시받은 업무는 칼같이 기한 내에 보고하며, 신뢰를 쌓아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름대로 자료를 분석하고, 개인적인 의견도 정리해 두었다. 적당한 기회에 슬쩍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고, 몇 번은 그러한 의견이 반영되기도 했다. 공은 철저히 상급자에게 넘겼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인정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맡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회사는 아직 별 볼일 없던 나에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겼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일의 ‘위임받기’에 성공했다.
그런데 중요한 업무를 맡고 나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내가 맡았던 단순한 일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게 단순한 업무들은 이미 숙달되어 시간이 필요할 뿐,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팀장은 업무 분장을 통해 나를 단순 업무에서 제외했다. 사실 나는 그동안 내 업무를 자동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더 중요한 업무를 ‘위임받기’ 위해서는 시간을 확보해야만 했기 문이다. 더 빠른 일 처리, 더 정확한 일 처리를 위해 개인적으로 매뉴얼을 만들었던 터라, 위임 과정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그로 인해 나는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맡게 되었다. ‘위임받기’를 통해 오히려 나는 의무가 아닌 자유를 얻었다. 해야 할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일을 늘리니, 일이 즐거워졌다. 삶이 즐거워졌다.
이미 단순 업무로 임계점을 넘긴 덕분인지, 새로운 업무는 수월했다. 중요한 업무일수록 성과는 눈에 띄었다. 그동안 팀장이 회사로부터 인정받았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굵직한 프로젝트를 도맡아 진행하면서 그 성과를 독차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부장의 성과는 오롯이 팀원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다. 팀원들이 단순한 업무를 처리하지 않았다면, 그로 인해 집중할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그 좋은 기획안은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주의는 통 안에 담긴 물과 같아서 자주 흔들면 잠잠해 질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고요한 집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물이 담긴 통을 자꾸만 흔들어서는 안 된다. 가만히 집중해야 한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말은 주의가 물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멋진 표현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대부분 평사원이다. 경영자도 아니고, 팀장보다 팀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단순 업무에 허덕이느라, 회사의 중앙무대에는 오르지도 못한 채, 주인공의 의상과 분장을 돕느라 평생을 허비할지도 모른다. 경영자가 아닌 우리는, 다양한 업무를 처리해야 하기에, 주의를 집중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집중이 필요하다. 멈추고 돌아보며, 제거할 일들을 찾아야 한다. 주변에 위임할 사람이 없다면, 더 빨리 처리하도록 실력을 키우고, 자동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나름의 절차서를 만들어 업무를 파악하고, 실수를 줄이도록 오답노트라도 만들어야 하며, 더 빨리 처리하는 방법을 늘 고민해야 한다. 위임은 꼭 필요하다. 반드시 사람에 위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에, 문서에 위임해도 괜찮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집중할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내적으로는 마음 챙김을 통해 목표에 집중하도록 애써야 하고, 외적으로는 방해를 줄이도록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주의라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의도적인 주의 집중이 중요하다.
<초생산성>을 읽으며, 나는 그 시절 내가 겹쳐 보였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초생산성>을 그때 읽었더라면, 조금은 덜 힘들지 않았을까? 지금은 더 나은 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지금도 누군가는 고통의 나날을 견뎌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고통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우리는 살면서 고통을 피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고통을 성장으로 바꿀 방법은 분명히 있다. 그 해결책은 쉽게 찾아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오랜 시간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쉽게 찾을 수도 있겠지만, 또 누군가는 번번이 실패하고 좌절할 수도 있다. 이번 책 <초생산성>은 그러한 시행착오를 줄여줄 것이다. 책에 소개된 다양한 기법들은 자신을 좀 더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초생산성>은 좋은 책이다. 이 책은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찾아가는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며, 수많은 의무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이 책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릴게 해줄 비법서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날의 나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는 이들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선 이야기는 모두 과거의 일이다. 지금은 또 한 번 회사를 옮겼다. 그때와 달리 회사는 커졌지만, 직급은 낮아졌다. 지금도 여전히 일이 많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일은 언제나 늘기 때문이다. 하면 할수록 그 양이 늘어나겠지만, 실력도 함께 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번 책을 통해 ‘의도적인 주의 집중’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초생산성>을 접한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의무를 모른척하지 않으려 한다. 죽을 것 같았던 고비를 넘기고 나니,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언제나 더 나은 해결책은 있기 마련이며, 언제나 더 좋은 기회는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멈추어 발견하고, 제거하고 옳은 일에 집중하는 이 간단한 방법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은 조금 억울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더 큰 자유를 향해 내가 가진 에너지를 집중하려 한다. 마치 돋보기가 빛을 모으듯 말이다. 우리 모두는 이미 성능 좋은 돋보기를 하나씩 갖고 있다. 성공의 차이는 집중의 차이일 것이다. 자신의 에너지를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작은 일상이 커다란 기회가 되기도 하고, 투명한 빛이 화려한 불꽃으로 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더 이상 흐릿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동안 마땅히 거절해야 할 것을 거절하지 못한 나 자신을 거절한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초생산성>에 담겨 있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은 즐거워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