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건너기_천선란 작가
어린 나를 만난다면 기분이 어떨까? 아직은 어리고 서툰 '그때의 나에게'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의 내가' 과연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그토록 힘들고 긴 시간 끝에 겨우 내가 되었다면 실망하지는 않을까?
소설 <노을 건너기>는 ‘어른 공효’가 ‘어린 공효’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이는 어른 공효가 받아야 할 훈련 중 하나였다. 그것은 더 넓은 우주로 나가기 전 거쳐야 할 하나의 관문에 불과했다. 그것도 아주 단순한, 그저 가상의 공간에서 어린 공효를 만나 함께 목적지까지 걸어가면 충분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공효는 응원과 위로를 받는다. 그동안 잊고 있던, 아니 모른 척했던 두려움을 더는 피하지 않게 된다. 그들은 상대에 대한 관심과 이해, 그리고 수용을 통해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해 나간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나는 잠시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물어본다. 나는 무엇이 두려운가?
어른 공효는 두렵다. 이미 수십 년을 우주에서 살았던 ‘어른 공효’였지만, 그런 그에게도 우주는 여전히 두렵기만 하다. 우주에 나가는 것은 마치 우주에 갇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디가 출구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면, 그건 갇히는 것과 같다는 공효의 말에, 나는 이 상황이 우리의 삶이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갇혀버리는 것은 아닐까. 산다는 건 마치 행복이라는 출구를 찾아 끝도 없이 펼쳐진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기만 하다. 어쩌면 삶에 갇힌 채, 어디로 흘러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그럴 때면 두렵다. 그것은 아마도 삶이 외롭기 때문이리라. 텅 빈 우주에 가늘게 떨리는 별빛이 마치 하루를 위태롭게 견뎌내는 내 모습 같아서 서글프기 때문이다. 혼자 툭 떨어져 나올 때면, 나 역시 그 외로움이 짓누르는 중력 때문에 숨이 막혔던 적이 있다.
나아가는 것과 갇혀버리는 것,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어쩌면 ‘외로움’ 인지도 모르겠다. 어른 공효가 우주에서 자신을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 다름 아닌 ‘외로움’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공효는 훈련을 시작한다. 그곳에는 AI가 만들어낸 어린 공효가 있었다. 매일 같이 홀로 노을을 노려보는 작은 아이, 그 아이는 그 자체로 외로움이었다.
어린 공효도 외로웠다. 그리고 그 외로움이 너무도 두려웠다. 어린 공효는 외로운 사람의 표정을 너무 빨리 보게 되었다. 어린 공효는 엄마의 무표정이, 그 외로운 정적이 두려웠다. 어린 공효는 지금보다 더 어린 공효였을 때부터 엄마와 단 둘이 살았다. 자신에게 엄마가 전부였듯이, 엄마의 세상도 자신 하나면 충분하리라 믿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자신이 엄마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엄마는 결코 외롭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엄마 역시 외로웠다. 어린 공효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빠였기에 아빠의 빈자리를 누구든 채워주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편이 아니면 안 되는 자리였다. 이는 어린 공효가 결코 메울 수 없는 빈자리인 셈이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의 시선은 어딘가 쓸쓸하다던데, 어쩌면 어린 시절 공효가 보았던 엄마의 표정은 남편과 함께 했던 행복한 순간을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쓸쓸한 시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외로움은 어린 공효를 숨막하게 했다. 그것은 어린 공효가 감당하기에는 벅찰 정도의 무게였다. 마치 숨이 막히듯 가슴이 짓눌렸을 것이다. 그때마다 어린 공효는 발악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발악이 아니었다. 살기 위한 외침이었다. 외로움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두려움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살고 싶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깊은숨이었다. 어른 공효가 우주에서 중력에 짓눌리지 않도록 후후 크게 내쉬는 깊은숨 말이다. 어린 공효도, 엄마도, 어른이 된 공효도 외로움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훈련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한데도 어린 공효는 그림을 깨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꽉 쥔 연필처럼 굳게 닫혀버린 어린 공효의 마음이 좀처럼 열릴 것 같지 않았다. 나도, 어른 공효도 답답했다. 그럼에도 어른 공효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대신 어린 공효가 그리는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해는 관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관심은 가만히 바라보는 것부터 해야 한다. 어른 공효는 어린 공효를, 즉 어린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깨작거리는 그림을 통해 어린 공효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관심을 보여준다. 이 같은 '다정한 시선'이 어린 공효의 외로움을 녹였다. 두려움의 무게를 덜어냈다. 어린 공효는 이제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기에 이른다. 손에 피가 날 정도로 꽉 쥔 주먹에 힘을 빼기 시작한다.
어쩌면 어린 공효가 주먹을 그토록 세게 쥐는 것은 외롭고 두렵기 때문이리라. 손톱이 파고들어 간 상처는 두려운 현실을 온몸으로 견뎌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어른 공효 잊고 있었다. 상처가 아물고, 흉터가 희미해지면서 그 시절 어린 공효의 아픔까지 모른 척했음을 깨닫는다. 이제 더는 모른척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둘은 서로의 손을 잡는다. 상처를 보듬어준다. 아픔을 감싸 준다.
어린 공효는 두려운 것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거미를 가장 무서워했다. 그건 어른이 된 공효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어른이 된 공효는 거미 말고도 신경 쓸게 아주 많아졌기 때문에 거미 정도는 길바닥의 돌맹치럼 여기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모른 체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어느새 서로의 비밀을 나눌 정도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함께 나아간다. 더 이상 두려움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려울수록 똑바로 바라보며 결국 이겨내고야 만다. 어른 공효는 어린 공효가 겪었을 외로움의 무게를, 그 힘들었을 시절을 말없이 안아준다. 어린 공효 역시 치열한 지금을 살아가는 어른 공효에게 든든한 응원을 보낸다. 둘은 서로 닮은 듯 다른 ‘나를 만나며’ 또 다른 내가 되어간다.
소설 <노을 건너기>에서 어른 공효와 어린 공효는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만나고, 관찰하고, 관심을 갖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서로의 아픔에 귀를 기울여준다. 그리고 서로를 보듬어준다. 소설에서는 어린 공효의 기억을 외롭고 두려운 것으로 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을 ‘건너가는’ 과정이 주된 내용이다. 하지만, 어린 공효가 아프고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의 다정한 눈 맞춤, 따스한 말투, 보드라운 손길은 분명 행복이었을 것이다. 외로움은 행복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립지만, 결코 돌아갈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일. 외로움은 그리움을 먹고 자라는 것 만 같다. 그리울수록 외로우니까. 우리는 외로움 직전의 행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추억은 바로 그 행복의 순간들이다. 비록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반짝이는 행복의 순간들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추억이라 부른다.
어른 공효와 어린 공효의 만남과 이별, 이해와 수용의 과정은 마치 툭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 것처럼 내 어린 시절을 깨웠다. 유독 힘들고 괴로웠던 상처가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행복했던 추억도 분명 자리하고 있었다. 아픈 배를 어루만져주던 할머니의 다정함,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 살갑게 몸을 비비던 고양이의 감촉들. 어떤 기억은 한 사람의 평생을 붙잡아주기도 한다던데, 외로운 요즘 그럼에도 여전히 그럭저럭 지내는 것은 내 안에 아직도 살아 숨 쉬는 이 같은 추억들 덕분일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귀를 기울여야겠다. 어린 공효의 목소리를, 아픔과 외로움을, 그리고 행복의 추억을 말이다. 소설 <노을 건너기>는 몸만 훌쩍 커버린 어른들에게 건네는 응원이자, 위로다.
만약, 소설처럼 지금의 내가 어린 나를 만난다면, 과연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그저 가만히 안아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시절 외로운 나에게 지금의 내 온기를 조금 나누어주고 싶다. 어린 내가 외로움으로 숨죽여 울더라도, 두려움에 파르르 떨더라도 나는 그것 역시 있는 그대로 보듬어 줄 것이다. 외롭고 두려웠던 기억도, 따스하고 행복했던 기억도 모두 소중하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우주에서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별빛은 없다. 나는 하늘이 되어주고 싶다. 못나고 가늘게 떨리는 별빛이라도 소중히 안아주는 어른이 되어주고 싶다. 어른이라면 누구라도 꼭 배웠으면 좋겠다. 서로를 안아주는 방법을, 노을 건너기가 전하는 이야기를 말이다. 노을을 건너 밤이 되면 비로소 깨닫게 된다. 모른 척했던 별빛이 사실은 언제나 그 자리에 늘 같은 빛을 내고 있었음을 말이다. 어쩌면 이토록 눈부시게 빛을 내는지, 하나같이 아름답고 소중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