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을 극복하는 힘 _엘리자베스 스탠리 지음(이시은 옮김)
드르륵. 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후다닥. 아이들은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오월의 어느 날. 이제 아이들은 제법 자기들끼리 친해졌다. 학기 초의 어색함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선생님은 복도를 바라보며, 손짓을 보낸다. 아이들도 일제히 고개를 돌려 복도를 바라본다. 그곳에 한 아이가 있었다. 쭈뼛거리며 꾸부정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그 아이, 전학생이었다. 재차 들어오라는 손짓에 그 아이는 마지못해 선생님 옆에 섰다. 익숙한 아이들 앞에 선 낯선 아이. 친하게 지내라는 선생님의 말에 다들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도 전학생이다. 얼마 전 나도 저 자리에서 저렇게 인사를 했었다. 나는 부모님의 직장을 따라 어쩔 수 없이 학교를 옮겼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대가는 온전히 내가 치러야만 했다. 억울했다. 이건 공정하지 않다고, 왜 내가 아빠 때문에 힘들어야 하냐고 대들기도 했었다. 소용없었다. 원하고 원치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내가 감당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반드시 감당해 내야만 했다. 외로움은 괴로움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 달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나는 아이들과 어울리려 참 많이도 애썼다. 어색함을 이겨내고, 불편함을 참아냈다.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괴로움을 조금 참아내면 외로움을 견뎌낼 필요가 없다는 걸 이전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그 ‘낯선 불쾌함’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괴로움을 억눌렀다.
새로움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다. 새로움은 낯선 불쾌함을 수반한다. 익숙함이라는 편안함을 방해한다. 하지만 편안함은 지루하다. 그래서 또다시 새로움을 기대한다. 새로움이 수반하는 불쾌함을 기꺼이 감수하고서라도 그것이 전하는 재미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 새로움의 유통기한은 너무 짧다. 기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어떤 새로움도 곧 익숙해지기 마련이며, 그러한 일상은 또다시 지루해진다. 새로움은 고통스럽겠지만 재밌을 것 같고, 편안함은 안전하겠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하다. 새로움도 편안함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삶은 고통이다.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고통을 피할 방법은 없다. 이는 삶을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도, 대충 뭉개버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당신만 힘든 게 아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간다. 오히려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이 더 클 수도 있다. 고통은 기대와 현실의 불일치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 두려움을 느낀다. 그럴수록 예측하고 예상하지만, 그러한 예상이 빗나갈수록 인간은 고통을 느끼기 마련이다..
기대와 다른 현실,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혼돈스럽다. 혼돈은 고통을 불러온다. 누군가는 이런 고통 속에 무력한 삶을 살아가거나 심지어 타인의 삶을 파괴하기도 한다. 반면, 누군가는 이러한 고통을 즐긴다. 그들은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려 노력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현실과 기대를 분리하며, 일부러 고통 속에 몸을 던진다. 현실을 넘어서는 이상적인 자아를 위해 기꺼이 가시밭길에 발을 내딛는다. 그들에게 스트레스는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정녕 그들은 혼돈에 따른 스트레스가 없는 걸까?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어째서 그들은 계획이 어긋나도, 불의의 사고를 당해도 기어이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걸까? 그들은 과연 우리와 무엇이 다른 걸까?
책 <최악을 극복하는 힘>은 스트레스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냥 마주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한다. 책에 따르면 “스트레스는 우리가 생존 뇌에서 위협적이거나 도전적이라고 인식하는 경험을 할 때마다 심신 체계가 보이는 내적 반응”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스트레스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본능인 것이다. 어쩌면, 인류는 스트레스에 대한 각성 덕분에 연약한 신체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스트레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니, 굳이 외면하거나, 억누를 필요가 없다. 우리의 일상에서 스트레스가 고개를 내민다면, 그저 마주하면 된다. 잘 위로해 주고, 토닥거려서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도록 해주면 된다. 필요한 것은 마주할 용기와 충분한 휴식이 전부다. 마치 아이를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
갓 태어난 아이는 양육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심지어, 아이의 성향이 양육방식에 따라 달라질 정도로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안정 애착은 ‘안정감’과 ‘주체성’이 그 핵심이다. 양육자가 안전한 테두리 안에서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 준다면, 아이는 세상을 안전한 곳으로 인식하며, 자신을 또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하며 성장할 수 있다. 주체성이 길러지는 것이다.
다 자란 성인이 스트레스를 대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당신이 아직 스트레스를 정면으로 마주한 적이 없다면, 당신의 스트레스는 이제 갓 태어난 아이와도 같다. 이제 당신은 스트레스의 주 양육자가 되어 스트레스와 안정 애착을 만들어야 한다. 스트레스가 모습을 드러낼 때 무시하고, 억압하기보다는 조금 불편하고 어색하더라도 마주 앉아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스트레스도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갓난아이들이 그냥 울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우는 아이들은 배가 고프거나, 어디가 불편하거나, 또는 불쾌할 수도 있다. 양육자는 그 원인을 찾아야만 울음을 그칠 수 있다. 아이들의 방긋 웃음은 덤이다. 이제 스트레스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라. 스트레스로 나타난 현상은 무엇인가? 몸에 염증이 생겼는가? 울음이나 분노인가? 쉬고 싶다는 신호인가? 다시 말하지만, 스트레스는 분명 그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스트레스와 마주하려면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잠시 멈추어 바라보려는 ‘지혜’와 어떤 어려움도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면하려는 ‘용기’ 말이다. 이러한 지혜와 용기를 통해 우리는 스트레스와 진정으로 마주할 수 있다. 한낱 시끄러운 울음소리라 치부해 버리면, 아이들이 온몸으로 전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관심이 없다면, 정성껏 살피지 않는다면 울음소리에 화를 낼 뿐이다. 어쩌면, 소리치고 외면하다가 포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트레스의 통곡’을 멈추게 할 유일한 사람은 당신뿐이다. 어쩌면, 스트레스는 당신의 손길이 간절한지도 모른다. 스트레스를 느꼈다면 멈추고 집중해서 바라보는 지혜를 발휘해 보라. 어쩌면 고통스러운 현실이, 아니,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과거가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외면하지 마라. 오히려 가장 고통스러운 지금이 스트레스와 마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바로 지금이 진실을 바라보는, 아니, 진실 너머의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진정한 용기를 발휘해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 멈춰야 한다. 멈추면 보일 것이다. 삶도, 자신도, 지혜와 용기도 말이다. 멈춘다고 해서 결코 뒤처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느린 것이 더 빠른 것일 수도 있다.
스트레스는 휴식을 원한다. 스트레스의 치료제는 휴식이다. 휴식을 가질 여유가 없다면 일과 가정, 관계와 자신에 대한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는 것부터 시작해도 된다. 그리고 잠시라도 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스트레스는 당신을 더욱 괴롭힐지도 모른다. 좋은 음식을 먹고, 자연 속에서 산책을 즐기고, 푹 자고, 자각과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다독여야 한다. 스트레스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양육자인 내가 어떻게 돌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면, 스트레스를 잘 돌보아야 한다. 삶은 온통 고통뿐이니, 그저 견디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뿐인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인내의 창’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인내의 창’을 키워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삶이 고통이기 때문이다. 책에는 인내의 창이 작아지는 원인을 ‘아동기의 역경, 쇼크 트라우마, 일상생활’의 3가지로 구분한다. 이는 우리가 겪는 스트레스의 외생적 원인이기도 하다. 이 중 ‘아동기의 역경’이나 ‘쇼크 트라우마’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다. 그 누구도 부모의 양육방식을 선택할 수 없다. 전쟁과 테러, 뜻하지 않은 사고 역시 내가 원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스트레스는 인생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망치는 스트레스, 이들은 내 삶의 주체성을 빼앗는 주범이다. 인내의 창을 넓힌다고 해서 이러한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나타나 일상을 어지럽히는 경우는 줄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오히려, 이러한 스트레스를 더 나은 삶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불운한 사건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보다 넓은 시야를 가져보자. 잠시 멈추어 바라보는 지혜와 진실을 피하지 않는 용기로 말이다.
‘일상생활’ 역시 인내의 창을 축소시킨다. 하지만, 이 영역은 위의 두 영역과 달리, 충분히 자신의 선택이 가능한 영역이다. 잘 먹고, 잘 자며, 잘 움직이는 것 등을 통해 스트레스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면, 스트레스 상황에서 한발 물러나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인내의 창을 두껍게, 그리고 넓게 만들어 준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잠잘 시간을 쪼개어 처리해도 우리 곁에는 여전히 해야 할 것들로 가득하다. 수많은 의무들에 파묻혀 포기하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만 시도하고 연습해야 한다. 연습은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연습은 삶의 방식이지, 명확한 보상을 바라는 과제가 아니다. 개인이나 집단이 무엇을 연습하느냐가 그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가치가 있다고 믿는지를 드러낸다. 그러니 ‘의무’가 아닌 ‘권리’에 집중하라.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아갈 권리’ 말이다. ‘해야 한다’가 아닌, ‘하고 있다’에 집중해야 한다. 완벽이 아닌 온전함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와 경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충분한 회복을 통해 두려움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당당히 '쉼'을 선택하라. 자꾸만 나를 괴롭히는 스트레스에게 위협이 아니니 걱정 말라고, 안전하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괜찮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주체성을, ‘인내의 창’을 키워야 한다.
삶은 고통이기에 살아가면서 스트레스를 피할 방법은 없다. 완전한 안정 애착을 가질 수도, 그 어떠한 사건에 연루되지 않을 수도 없다. 일상생활은 여전히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회복이다.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인내의 창 안으로 다시 들어와 충분히 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안전지대를 벗어나더라도 완전히 회복하는 것, 통제력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그것을 키워내는 것이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최악을 극복하는 힘’인 것이다. 더 이상 스트레스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무력한 자신을 탓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기억할 단어는 오직 ‘와이든(widen)’ 하나면 충분하다.
이 책 <최악을 극복하는 힘>은 스트레스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집단적 스트레스’에 있다. 스트레스를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한 단계 이끌어낸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양육자의 스트레스가 갓난아이에게 전해지듯 스트레스는 ‘전염성’이 있다. 그래서 리더가 가진 ‘인내의 창’이 더욱 중요하다. 그들이 가진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이들을 더 아프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잘 돌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셈이다. 사회적 약자는 더 아프다. 절대적인 시간도, 회복할 여유도 없다. 사회적 연결과 유대도 빈약하기 마련이다. 불안정 애착과 성장기의 트라우마는 대물림되어 악순환을 반복할 뿐이다. 그들에게 스트레스는 험준한 산과 같다. 당당히 마주하기도, 넘어서기도 두렵기만 하다. 그러니 자꾸만 돌아서서 모른 척하게 된다. 그들은 스트레스를, 그리고 세상을 자꾸만 외면하게 된다. 결국, 그들이 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은 투쟁, 도피, 동결을 반복할 뿐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 아니던가. 우리에게는 거울 뉴런이 있다. 이는 타인과의 공감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아픔처럼 희망에도 공감할 수 있다. 스트레스가 전염되듯 희망도 전염된다. 만약, ‘집단적 인내의 창’이 넓어진다면, 지금껏 어쩔 수 없이 ‘더 아플 수밖에 없는 그들’도 분명 더 건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수군대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자, 조용!”
두꺼운 교무수첩이 교탁을 탕탕 두드린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듯 그 아이가 움찔했다. 그 모습에 아이들은 또 까르륵 웃는다. 왠지 기분이 좋은 시작이다. 저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무엇을 좋아할까? 나랑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낯선 새로움은 이제 더 이상 ‘불쾌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묘한 호기심’을 불러왔다. 왠지 앞으로 재밌을 것 같다는 기대가 더 크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건네야겠다.
"반가워, 친구야.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자."
이번 책 <최악을 극복하는 힘>은 600페이지 넘는 엄청난 양과 극강의 난이도를 자랑했습니다. 어렵고 길었다는 뜻입니다. 읽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으며, 험난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읽었습니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요약을 하며, 이해하려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습니다. 같은 구절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다가도 책을 읽다가 졸리면 덮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은 체크만 해 두고 그냥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마치 “작가가 우리에게 ‘스트레스’라는 친구를 소개해 주는 것 같다."라는 생각 말이죠. 마치, 전학생을 소개하듯 스트레스와 사이좋게 잘 지내라며 당부하는 선생님 같았다고나 할까요? 방대한 내용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이해한 내용이라도 온전히 담아내 보려 며칠을 고민했지만, 미천한 글 솜씨는 요약도 중구난방이 되더군요. 그래서 결국 욕심을 내려놓았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스트레스와 마주 앉아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이번 글은 그렇게 써 내려갔습니다. 이번 책을 통해 이제 저는 스트레스를 좀 달리 보려 합니다. 쭈뼛거리며 인사하는 스트레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보려고요. 이렇게 말이죠.
“반가워, 스트레스야.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