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는 체념이 키운 보이스피싱의 비극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에서 주인공 만수는 취업 경쟁자를 살해한 뒤 스스로의 머리를 두드리며 외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한다. 변호사인 나는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을 만날 때마다 이 대사를 떠올린다. 해외 거점의 총책 검거 어려움을 설명하고, 대포통장 명의자 엄벌의 한계를 이야기하며 결국 '어쩔 수가 없다'는 말로 상담을 마무리하곤 했다. 자기 합리화로 여겼던 그 말이, 최근 캄보디아 전자금융사기 조직의 검거로 단지 자기 합리화의 변명거리였음이 밝혀졌다.
경찰은 고소장을 들고 찾아온 피해자의 간절한 절규에 해외에 있는 보이스피싱 조직을 잡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법원은 억울하게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하위 조직책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보이스피싱 피해 예방을 위해서는 엄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각자 최선을 다하지만 구조적으로 어쩔 수가 없다는 논리였다. 그 사이 2024년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천문학적 숫자로 불어났고, 피해자들의 고통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우리 모두의 '어쩔 수가 없음'은 거대한 비극을 방치한 자기합리화였다.
최근 캄보디아 전기통신금융사기 조직 검거는 이 견고한 벽에 균열을 냈다. 대통령이 단호한 의지를 보이고 언론이 주목하자 불가능해 보였던 국제 공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조직원들은 줄줄이 송환됐다. 이 사건이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그동안의 '어쩔 수가 없음'은 진짜 불가능이었는가, 아니면 의지의 부재였는가.
하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책임 회피의 도구로 소비하고 있다. 정치권은 송환된 이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를 따지며 정쟁의 수단으로 삼고, 언론은 자극적 범죄 과정을 묘사하며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 보이스피싱 범죄를 캄보디아 정부 탓으로 돌리는 여론도 있지만, 보이스피싱은 이미 만연한 문제로 라오스, 미얀마, 필리핀, 중국, 아프리카까지 거점을 옮겨다닐 수 있다. 이런 소모적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정작 범죄의 뿌리는 더 깊이 내리고 있다.
우리가 이 일련의 사건에서 물어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왜 청년들은 위험을 알면서도 고수익 해외 취업 미끼에 걸리는가. 왜 서민들은 불법인 줄 알면서도 생계를 위해 통장을 내주는가. 보이스피싱은 피해자의 돈만 빼앗는 게 아니다. 무너진 사회 안전망과 그 끝에 있는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용한 악독한 범죄다. 절박한 이들을 가해자로 만드는 이 범죄는 우리 사회의 경제 양극화가 낳은 구조적 문제다. 변호사인 나 역시 피해자의 절규 앞에서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며 내 소극성을 합리화해왔는지 모른다.
더 우려되는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 딥페이크와 AI가 범죄를 설계하고 관리하는 시대가 곧 올 것이다. AI가 범죄의 중심에서 인간은 자금 세탁과 인출의 말단 도구로 전락할 것이다. 범죄의 핵심 세력은 AI 뒤에 숨고, 인간 부속품만 처벌받으며 피해 회복은 더욱 요원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정말로 '어쩔 수가 없는' 세상에 살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체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치권과 언론은 책임 공방과 자극적 보도를 멈추고, 우리 사회가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성찰해야 한다. 국제 공조 상시화, 범죄 수익 환수 제도 개선, 취약 계층 안전망 구축, 청년 일자리 대책. 근본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진짜 비극이 오기 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법률사무소 어스
백수웅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