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문 앞에 남겨진 가방 하나
밤새도록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K씨는 낯선 도시의 좁은 골목을 헤매며, 스스로도 설명하기 힘든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문 앞에 놓인 봉투를 집어 들고, 약속된 장소에 가져다주는 일. 그저 시켜서 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그는 ‘절도’라는 이름의 무거운 죄목 아래 서 있었다. 구치소의 면회실에서 마주한 그는, 무언가를 훔치려는 의도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그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었다. 취업 사이트에 올려진 구인 글, 번듯한 홈페이지, 서류 전형과 면접, 근로계약서. 외국인 노동자가 기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합법적 기회’처럼 보였다. K씨는 자신이 가구 회사의 대금 수금 직원이 되었다고 믿었고, 수거 장소가 피해자의 집이라는 사실조차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검찰은 그의 손에 쥐어진 현금 뭉치를 두고 절도라고 보았다. 피해자의 문 앞—사법 실무에서 ‘여전히 피해자의 점유 아래’로 해석되는 그 지점을 침탈했다는 이유였다.
사건의 실마리는 디지털 증거에서 시작되었다. 수사기관은 그의 휴대전화에서 대화 내용을 탐색하며 범죄 가담을 입증하려 했지만, 변호인의 참여권이 보장되지 않은 채 증거가 수집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형사절차에서 가장 먼저 살피는 것은 언제나 ‘어떻게 얻어진 증거인가’이다. 아무리 명확한 듯 보이는 메시지일지라도, 위법하게 수집되었다면 법정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 한 줄의 대화가 유죄와 무죄를 갈랐고, 이 사건에서도 결국 핵심 증거는 배제되었다.
그러나 절정은 그보다 앞서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기망책이 아니었다. 피해자에게 전화도 걸지 않았고, 돈이 누군가의 삶을 뒤흔든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가 이해한 ‘업무’와 실제 범죄의 구조가 얼마나 어긋나 있었는지, 그 괴리를 법정 언어로 설명하는 일이 이번 사건의 핵심이었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만들어낸 허구의 ‘회사’는 완벽에 가까웠고, 그 조직의 교묘함에 가장 먼저 희생된 이가 바로 K씨였다.
법원은 그가 절도를 저질렀다는 인식, 즉 고의를 검사가 합리적 의심 없이 입증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그 판단이 내려진 순간, K씨는 긴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의 돈을 훔치려 했던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사람이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무죄 판결이 그의 삶을 완전히 회복시킬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가 더 이상 범죄자로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작은 출발점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이 사건은 보이스피싱이 피해자뿐 아니라 하부 조직원으로 이용되는 이들에게까지 어떤 상흔을 남기는지,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형사절차가 얼마나 섬세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결국 변호의 작업은 ‘의심스러운 정황’ 속에서 사람을 다시 꺼내오는 일이다. 그 사람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지점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것. 이번 사건도 그랬다.
※ 본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각색되었으며,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구체적인 사실관계가 수정되었습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법률사무소 어스에 문의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