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번호로 시작된 진실
처음 그 사건을 들었을 때, 나는 오래된 진료기록부 한 장을 떠올렸다. 빈 칸보다 더 많은 말이 적혀 있었고, 그 문장들은 모두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쓰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보호받아야 할 사람은 정작 그 기록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의뢰인은 그날을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하루”라고 말했다. 주사 한 번, 통역 한 명, 그리고 여권 사본 하나. 그 단순한 조합이 이렇게 긴 수사의 시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른바 ‘주사이모’로 불린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많은 이들은 개인의 일탈로 정리하려 했다. 무면허 시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그러나 출입국과 외국인 환자 유치 관련 형사 사건을 오래 다뤄온 실무자의 눈에는 다른 구조가 보였다.
이 사건은 단일한 행위가 아니라, 여러 법률이 층층이 겹쳐 있는 복합적인 시스템의 균열이었다.
문제는 주사 그 자체가 아니었다. 시술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누가 약을 확보했는지, 그 약이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 그리고 그 모든 행위가 ‘판매 목적’이라는 단서와 연결되는 순간 사건의 성격은 달라진다.
실제 판매가 입증되지 않아도, 택배 수령 기록과 메신저 대화만으로도 범죄는 성립한다. 현장에서 이 조항이 무서운 이유는, 의도가 증거로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외국인환자유치업자가 개입하면 이야기는 더 깊어진다.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병원과의 관계, 반복성, 영리 목적이 동시에 검토된다. 무면허 의료행위가 반복되고, 병원이 이를 알고도 묵인했다면 책임은 개인을 넘어 조직으로 확장된다.
이 지점에서 수사는 더 이상 가볍지 않다. 보건범죄단속법이 적용되는 순간, 형량의 무게는 전혀 다른 차원이 된다.
가장 많은 질문을 받는 부분은 대리처방이었다. 환자를 직접 보지 않은 채 여권 정보만으로 이루어진 처방은, 그 자체로 금지된 행위다. 설령 실제 환자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기록이 남고 약이 이동했다면 위법성은 인정된다.
여권 도용이 겹치면 문제는 더 커진다. 문서에 관한 범죄, 그리고 그 문서를 이용해 시스템을 속였다는 점에서 업무방해까지 이어질 수 있다.
진료기록부는 종종 가볍게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과 다른 기록은 행정상의 실수가 아니라 형사처벌의 대상이다. 외국인 환자 유치 사건에서는 내원 기록, 상담 내용, 동의서가 ‘사후에’ 정리되는 경우가 많다. 그 사후성이 문제다. 기록은 기억을 대신하지만, 거짓을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여기에 의료기기까지 무허가로 유통되었다면, 사건은 또 한 번 확장된다. 필러와 리프팅 실, 장비 하나하나가 별도의 범죄 구성요건이 된다. 최근 들어 외국인 환자 유치와 연계된 의료기기 불법 유통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을 지나며 내가 반복해서 느낀 것은, 이 유형의 사건이 결코 하나의 법 위반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작은 단순해 보이지만, 구조를 따라가다 보면 약사법, 의료법, 외국인환자유치 관련 규정, 그리고 가중처벌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어느 한 지점에서의 안일한 판단이 전체를 무너뜨린다.
외국인 의료관광이 확대되는 지금, 브로커를 통한 불법 의료행위는 줄어들 기미가 없다. 사고나 분쟁이 발생했을 때, 초기 대응에서 형사 책임 구조를 정확히 읽지 못하면 개인과 병원 모두 회복하기 어려운 지점으로 밀려난다. 조사 초기의 한 문장, 하나의 진술이 공모 여부를 가르는 경우를 나는 수없이 보아왔다.
사건이 마무리된 뒤, 의뢰인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완전히 같은 자리로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무너진 바닥에서는 벗어났다. 기록은 정리되었고, 남아 있던 오해들도 법의 언어로 설명되었다. 그 과정은 조용했지만, 분명한 회복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되었다. 이 사건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감정적인 단죄가 아니라, 구조를 읽어내는 냉정함이라는 것을.
※ 본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각색되었으며,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구체적인 사실관계가 수정되었습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법률사무소 어스에 문의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