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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의 Apr 18. 2024

[서평]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사랑까진 못해도 이해할 수는 있다



◇ 아직도 '착한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어느 날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착한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어졌다는 생각 말이다. 


한밤중에도 운전 신호를 철저하게 지키는 운전자를 찾아 상을 주는 이야기, 열악한 환경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새 집을 지어주는 이야기, 시민들에게 좋은 책을 권하는 이야기. 어릴 때 자연스럽게 접했던 이런 이야기들은 성인이 된 이후로는 예전만큼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을 때 훨씬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이러한 반응은 곧 돈으로 이어진다는 걸 눈치챈 매체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매체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만난 사람들도 딱히 친절을 원하지는 않았다. 전혀 거창하지도 않고 위대하지도 않아서, 천국으로 가는 계단에 쌓인 먼지조차도 될 수 없는 정말 작고 사소한 친절마저도 우습게 보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착한 말은 현실성 없으니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고 단정하는 사람, 친절한 말을 하는 사람은 다 가식을 떠는 것이고 그들의 모든 행동은 위선이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 칭찬을 들어도 '그런 말 한다고 좋아할 줄 아나 봐'라고 응수하는 사람 등등.


이와 반대되는 쓴소리는 다양한 변주를 거듭하며 존재감을 키워갔다. 번아웃은 사치다, 이렇게 좋은 시대에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건 정신병이다, 00 안 하면 인생이 꼬인다, 내 성공을 의심하는 부류는 다 자아가 너무 센 사람들이고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영영 성공 못할 것이다 등등. 누군가는 이 말에 기분이 상할지는 몰라도 이런 말을 하면 돈을 벌 수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친절한 말과 쓴소리 모두 인생에 꼭 필요한 말인데, 왜 이 세상은 친절을 훨씬 더 우습게 보는 것처럼 느껴질까? 


© sincerelymedia, 출처 Unsplash

처음에는 그 답을 찾기 어려웠지만,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죽은 사람들은 혼자 다니던 사람 혹은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어느 외국 할아버지의 글을 온라인에서 본 이후로 나는 타인의 친절함을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머리 위로 총알이 오가는 위협이 없어도 한국은 휴전국이고 이곳에서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는 것에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지금 이 사회에서 친절해질 여유나 이유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김초엽 작가님의 SF 단편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는 내내, 이 책에는 친절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매우 놀라웠다. SF 소설의 단골 소재인 '추잡한 성적 욕망을 채워주는 인간형 기계'도 없고, 인간의 추잡한 욕망은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 피어나는 게 당연하다고 단정 짓는 주제 의식도 없었다. 단지 타인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이해, 공감, 공존, 배려에 대해서만 담담하게 전할 뿐이다.




◇ 착한 이야기는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7가지 단편은 모두 과학이 발달된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서는 노인도 우주를 항해하는 셔틀을 직접 운전할 수 있고, 우주를 여행하기 위해 신체를 개조하는 일도 벌어지고, 감정을 물질로 만들어 소유할 수도 있다. 


하지만 21세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점 또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엄마와 딸이 주고받는 감정은 사랑과 증오 사이를 오가고, 외모로 인한 차별이 존재하고, 아이를 출산하고 지병이 있는 유색인종 여성이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하지만 김초엽 작가가 이들을 내세워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공존이다. 작가는 그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이들도 이 세상의 구성원이라고, 심지어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이 비록 이들과 같지 않더라도 이들을 이해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우주선이 추락한 탓에 홀로 외계 생명체와 마주한 생물학자 희진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 <스펙트럼>에서는 생김새, 언어, 생활 방식 모두 인간과는 전혀 다른 외계 생명체가 등장한다. 


희진을 돌봐주기로 마음먹은 외계 생명체 루이'들'은 인간인 희진과 온전히 소통할 수 없다. 하지만 서로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서로 소통하려 노력하고, 서로 배려한다. 지구로 돌아가게 된 후에도 희진은 루이들을 이해하려는 시도 끝에 루이가 남긴 한 문장을 해석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 youssefnaddam, 출처 Unsplash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남과 나를 어떤 식으로든 구분하려고 한다. 나이대별 자주 사용한 전자기기, 현재의 거주지, 취향, 문화생활, 소비 수준 등 나와 남의 다른 점을 찾아야만 비로소 나를 알 수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을 구성한 모든 것을 극도로 세분화해서 나누고 본다. 


하지만 <스펙트럼>에서 보여주는 세상은 사뭇 다르다. 다른 것은 꼭 배척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나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생명체가 존재하는 세상을 보여준다. 물론 그 세상에서도 이러한 '친절'은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받는다. 하지만 누구의 눈길이 닿지 않는다고 해서 친절의 가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 아니면 남'이 아닌, '우리'로 구성된 세상의 모습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무척 친절한 소설집이다. 또한, 미래 배경을 소재로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무척 현실적이다. 


친절하고 착한 건 '현실성이 없다'라는 주장이 언뜻 보면 타당해 보일 수는 있어도 절대 사실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알아갈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타인을 무턱대고 비방하고자 하는 악의적인 목소리가 너무 커서 잘 들리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래도 현실에는 여전히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목소리가 버젓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나 있는 것과 소멸되어 버린 것은 다르다. 



사랑할 수는 없더라도 이해할 수는 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함께 살아갈 수는 있다. 함께 살기 어려워 보일지라도 적어도 시도는 해볼 수 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전해주는 메시지다. 쓴소리가 착한 말보다 훨씬 '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때, 그 현실에는 언제나 '우리'가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해내보면 어떨까. 타인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어도 조금이라도 이해하거나 함께하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언제나 우리와 함께했던 현실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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