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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의 Apr 08. 2024

나는 잡지와 어울리는 사람일까?

매주 매거진 읽기에 도전해 보다


 어릴 때는 잡지와 거리를 두었다


나는 생각보다 포용력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도서관에 꽂힌 잡지 목록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책표지로 책을 판단하지 말라는 오래된 문장을 잘 따르는 편이긴 했어도 언제나 잡지는 예외로 두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잡지에는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어쩌면 미용실 탁자 위에 놓인 너덜너덜한 잡지가 내 인생의 첫 잡지였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 싶다. 반곱슬 머리는 꼭 일자로 펴야 한다는 말에 차마 의문을 던질 줄도 모르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세상 물정을 몰랐던 어릴 때의 나에게는 잡지는 펼치는 것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단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모르니 시의적절한 트렌드가 담긴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잡지 속 글씨는 너무 작았으며,  종이는 너무 크고 무겁고 손이 미끄러질 정도로 반들거려서 영 어색했다. 실험적인 메이크업이나 의상을 입은 잡지 속 모델은 언제나 나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래서 아무리 미용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할지라도 시간을 죽이기 위해 잡지를 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잡지는 미용실에만 있지는 않았다. 과학 잡지, 논술 잡지, 만화 잡지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시기도 있었다. 그래도 잡지는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았고, 유난히 달라 보여서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다. 심지어 잡지에는 사람들이 동경할 만한 멋진 브랜드, 최신 트렌드, 세련된 아름다움이 담겼다는 개념을 알게 된 이후로는 더 이상 잡지와 가까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토록 잡지에는 멋진 것들이 담겨있다면, 일단 나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정제되지 않은 B급스러움을 좋아하고, 유행과 뒤떨어져도 상관없어하고, 사람들이 잘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라면 일단 좋아하고 보는 지독한 취향도 세련된 잡지와의 거리를 벌리는데 한몫했다는 건 성인이 된지 한참 지난 후에야 겨우 알게 되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취향을 넘어섰다


그래서 잡지를 읽는 모습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나와 다르게) 멋있고 쿨한 사람일 거라는 선입견에 오랫동안 빠져있었고, 이런 선입견은 작년까지만 해도 무척 견고했다.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을 기회가 없었다면 올해도 그랬을 것 같다. 


몇 년에 걸쳐 서서히, 나는 분야에 상관없이 텍스트를 작성하는 일이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모습'이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정말 많이 접하고, 그들이 읽거나 쓴 책도 들여다보고, 심지어는 그들이 여는 모임에도 여러 번 참가해 보았다. 그중에는 잡지 에디터, 세련된 라이프 스타일을 고객에게 전달하는 카피라이터, 출판사 사장님도 있었다.


세련된 잡지, 세련된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심적 거리감은 그 과정에서 아주 조금씩  변화했다. 잡지 속 칼럼을 쓰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세련된 삶의 모습을 제시해 주는 사람이, 매달 시의적절한 기획력이 돋보이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 이렇게 멋지다면 그들이 만든 결과물은 어떤 모습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어쩌면 잘 찾아보면 내 취향의 B급 유머로 도배된 잡지, 거칠고 잘 구겨지는 잡지, 멋지지 않은 화보가 담긴 잡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과 돈이 많고 운도 좋다면 언젠가는 그런 잡지를 직접 기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심적 장벽이 무너지자 재미난 상상이 그 자리를 대체했지만 일단은 눈앞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잡지를 들춰보는 시도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 '전형적인 잡지'로 분류된 잡지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크고, 무겁고, 반들거리고, 세련된 화보가 담긴 잡지부터.  





 잡지를 낯설어하니 더욱 잘 보인 잡지의 특징


① 잡지는 '진짜로' 시야를 넓혀준다


그래서 보그 코리아를 읽기 시작했는데, 목차의 깨알 같은 글씨부터 하나하나 인내심 읽게 읽다 보니 깜짝 놀랐다. 왜 잡지는 트렌디한 매체인지,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 잡지를 읽으며 에디터가 묘사하는 잡지 속 세계를 동경했다는 증언을 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 달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슈와 관련된 내용은 무조건 포함되어 있는 건 당연하고, 잡지의 기획과 너무 잘 어울리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화보, 눈길을 사로잡는 카피, 어른이 되면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유머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일상 속 자잘한 소품의 컬러감에 주목하여 독특한 메이크업을 선보인 기획을 읽고는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 소개를 이렇게 소개할 수 있구나'라는 배움을 얻었고, 유명한 외국 배우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방문한 스파를 서로 다른 에디터가 직접 방문해 본 기획을 읽고는 '굳이 이런 곳에 돈을 써야 할까?'라는 의문이 드는 소비를 에디터마다 어떻게 설득력 있게 소개했는지 그 비결을 엿볼 수 있었다. 게다가 나의 취향에 꼭 맞는 알고리즘 속을 헤매다 보면 절대로 그 존재를 알 수 없는 멋지고 대단한 인물의 인터뷰도 포함되어 있었다. 


딱 한 시간만 읽었을 뿐인데도 잡지 속 세상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그에 따른 단점도 있었다. 세련되고 멋진 유명 브랜드명이 동네 친구 부르듯 곳곳에 아주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주변 사람들이 '스몰 럭셔리'소비를 위해 흔히 구매하는 제품들도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SNS 때문에 사람들의 소비 수준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관념적인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명품과는 진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도 잡지에 소개된 대부분의 브랜드를 다 알고 있다는 점, 심지어 그 브랜드 제품을 구매한 사람들을 꽤 봤다는 점을 알게 되니 위기감마저 느껴졌다. 그래서 경제력에 비해 소비 수준이나 제품을 보는 눈이 지나치게 높아지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스몰 럭셔리'를 위해 구매했던 몇몇 향수들은 유통기한이 넘은지 한참 지날 때까지 다 쓰지도 못했다는 점도 갑자기 떠올라서 잠시 후회스럽기도 했다.






 잡지에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잘 드러나있다


잡지는 내가 이해하기에는 어렵고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잡지는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문장을 상당히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사람에 대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문장이 많았다.'갓생을 위해 오늘도 영양제를 포식했다', '예술은 다른 특별한 게 아니라 삶 자체가 아닐까', '시성비죠', '이 어린 반항아들도 인테리어의 일부인 걸까요?' 등등 어떤 문장을 써야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을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잡지는 '지금,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월간 디자인 3월, 4월 호를 읽을 때는 잡지가 독자의 시야가 어디로 향해야 할지 분명하게 제시해 주는 매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4월 호에는 과감하게 리브랜딩을 한 기업들의 사례들이 담겨 있었는데,'다양한 기업의 리브랜딩'이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마치 사진처럼 ABC 순서를 매겨 실은 점도 인상적이었다. 





또한 각 기업마다 리브랜딩을 하게 된 이유를 소개하고, 각 기업마다 미래 시장을 어떻게 예측했으며, 이를 위해 어떤 리브랜딩 전략을 세웠는지 그 과정이 담겨 있어 무척 유익했다.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그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아름다운 디자인을 보는 걸 좋아하고, 브랜딩 전략은 어떤 방식으로 수립되는지 궁금해하는 독자도 흥미롭게 읽기 좋은 내용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다른 잡지도 지향하는 바가 아닐까. 잡지의 타깃으로 삼는 주요 독자들을 고려할 뿐만 아니라 우연히 서점에서 잡지 코너에 방문한 사람에게도 다가갈 수 있을 만큼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우리가 맞이할 내일'을 위한 기획을 세우는 것 말이다. 이로써 잡지는 너무 세련되어서 나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편견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깨알 같은 글씨를 한두 시간 정도 읽는 것만으로 많이 희석되었다. 잡지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위한 매체였다.




잡지 속 인상적인 문장은 별도로 기록해두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만 있다면 잡지는 누구에게나 어울린다



3주 동안 주말 하루만 투자해서 잡지를 읽은 것뿐이니, 아직은 잡지에 대한 모든 걸 알아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잡지를 너무 어려워한 탓에 미리 세워두었던 높은 심리적인 장벽은 다소 누그러졌다. 


그리고 어쩌면 내 취향에 꼭 맞는 잡지를 내가 직접 만들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기존에 발행된 잡지에서 나와 꼭 맞는 기사를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지는 언제나 우리의 현재, 그리고 우리가 현재 대비해야 할 미래를 제시해 주는 매체임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내 취향을 잃지 않으면서도 나와 다른 취향과도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법도 배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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