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2부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현실을 인식하라
40. 호의를 얻으려면 먼저 호의를 배풀어야 한다.
사람들의 호감에 관하여. 호의를 얻으려면 먼저 호의를 배풀어야 한다. 즉, 선한 행동과 말을 하고, 더 좋은 행동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해야 한다. 예의는 위대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현혹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스물한 살에 결혼한 친정엄마는 한글을 배우지 못했다. 강원도 화천으로 시집 와 경제권 없이 평생을 살아오셨다. 남편이 장을 보고, 돈을 관리했고, 엄마는 그 안에서 묵묵히 살아냈다. 버스를 타면 멀미약을 드셔도 고통스러워했고, 평생 농사일을 도맡았다.
대부분의 시골 어르신들처럼, 엄마도 글을 모르고 살아오셨다. 셈할 일도 많지 않았고, 그게 큰 불편인 줄도 모르셨다. 나 역시 엄마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알게 되었다. 분명 답답함이 있었을 텐데, 그 마음을 헤아려보지 못했다.
팔십이 넘은 어느 날, 엄마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내가 글을 몰라서… 그게 한이야.”
그 말이 얼마나 부끄러우셨는지, 작은 목소리로 꺼내셨다.
나는 글밥이 적은 동화책과 두꺼운 노트를 사서 드렸다. 처음엔 부담스럽다며, 자신이 없다며 머뭇거리셨다. 하지만 반복해 쓰다 보니 글자가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고 하셨다.
그 후 몇 달 동안 엄마의 학습을 챙기지 못했다.
다시 봤을 때, 엄마는 자신의 이름을 겨우 쓰고 계셨다. 마치 한자를 그리듯, 글씨를 그리듯 한 글자씩 적어나가셨다. 지우개가 닳자 “이거 또 있냐”고 물으셨다.
일 년이 지난 지금, 어려운 받침이 있는 단어는 여전히 어렵지만, 웬만한 문장은 읽고 쓰실 수 있다. 틈날 때마다 하루 다섯 시간씩 글을 읽고 쓰신다. 어디까지 썼는지 잊으면 다시 처음부터 찾는다.
그 끈기와 용기 앞에, 나는 자주 울컥한다.
글을 모른 채 평생을 살아왔어도 그건 죄가 아니다.
엄마의 배움은 죽기 전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였다.
몸이 불편해 병원을 자주 다니시고, 서울생활이 어색해 말수도 줄어든 엄마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어하셨다. 요양사를 모셔야 할 상황에서도 몇 년을 반대하셨다. 사람을 대하는 자신감조차 없으셨던 것 같다.
반강제로 요양사를 채용한 뒤, 나는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됐다.
엄마는 요양사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셨다.
고기반찬이 나오면 “선생님, 많이 드세요.”
놀이터에 나가 다른 어르신을 만나도 “선생님”
집에 누가 찾아와도, 사회복지사가 방문해도 “선생님, 이거 좀 드셔보세요.”
엄마는 가족이 아닌 모든 이들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정중하게 대하신다.
그 모습을 보는 나는, 나보다 한참 어린 분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하게 된다.
내가 배운 건, 말이 아니라 엄마의 태도였다.
우리는 흔히 노인들을 고집스럽고, 어눌하고, 반말을 쉽게 하는 존재로 오해하곤 한다. 거리감을 두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시선을 조용히 부수며 살아오셨다.
어려운 시절을 지나며 몸에 밴 선한 태도, 예의, 사람을 향한 따뜻함이 엄마의 삶을 지탱해온 힘이었음을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요즘도 TV 자막을 빠뜨리지 않고 읽으려 애쓰신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모습이 아름답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운 몸이지만, 여전히 배움을 멈추지 않으신다.
엄마에게 모든 사람은 ‘선생님’이다.
사람에게서 배우고, 그 배움을 행동으로 실천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엄마가 나에게 주는 가장 깊은 호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