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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믿는 사람은 금방 수치를 당한다.

by 또 다른세상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5부 지혜는 내면의 절제에서 나온다.

내면

154. 쉽게 믿는 사람은 금방 수치를 당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쉽게 믿지도, 쉽게 사랑하지도 않으려 한다. 믿음은 가볍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확인된 진실 위에 놓아야만 하는 귀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말보다 행동으로 속이는 세상이니, 믿음은 더 신중해야 한다.


목사인 그녀는 오늘 서류를 제출하러 학교를 찾았다. 편입을 하고, 사회복지사 1급 자격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제출 창구 앞에서 만난 한 여성 목사님이 말을 걸어왔다. 단기 기억상실을 앓고 공부를 다시 시작했으며, 스물두 살에 위암을 기도로 치료했다고 했다. 전문학사 과정을 마치고, 노인을 위한 기관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돌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쉴 틈 없이 들려주었다. 기도와 안수로 아픈 이들을 위로하고, 끝까지 동행한다고 했다. 조선족 환자를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시키고 매일 찾아가 기도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명함을 건네며 언젠가 교회에 와 달라고 했다.


같은 버스에 타게 되자, 그는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등록금이 필요해 기도하고 있다는 이야기, 컴퓨터를 사야 한다는 걱정, 그리고 편입하면 꼭 이루고 싶은 계획까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내 이야기까지 보태면, 버스 안 사람들에게까지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홍대입구역에서 그가 말했다.

“다음에 면접 보러 오시면 꼭 얼굴 보면 좋겠네요.”

그리고는 환하게 손을 흔들며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 숨을 쉬었다.

그제야 조용해진 세상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끝없는 말을 쏟아내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스스로의 선함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선택받고 싶은 간절함. 인정받고 싶은 자부심.

문득 생각했다.


나이가 들수록, 말을 많이 하는 대신 입을 좀 더 굳게 닫아야겠다.

말이 많을수록 상대가 피곤해질 수 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했던 말이 오래 머물렀다.

“암 환자는 제가 책임지고 고칠 수 있어요.”

아마 내가 암 환자인걸 알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을 아끼는 게 더 나은 순간도 있다는 걸 다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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