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6부 이 세상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다.
평정심
210. 같은 진실이라도 금을 입혀야 할 때가 있다.
진실을 다룰 줄 알라. 진실은 위험하지만, 바른 사람은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때도 기술이 필요하다. 사람의 영혼을 노련하게 다루는 의사들은 진실을 달콤하게 만드는 방법을 만들어 냈다. 같은 진실이라도 누군가에게는 기쁨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아픔이 되기 때문이다.
같은 진실이라도 금을 입혀야 할 때가 있다.
진실은 언제나 옳지만, 언제나 안전하지는 않다. 진실을 다룰 줄 아는 기술이 필요한 이유다. 바른 사람은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 말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 그래서 진실 앞에서는 용기보다 지혜가 먼저 필요하다.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의사들이 진실을 달콤하게 전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정의학과 진료실에서, 선생님은 친정엄마의 손을 잡고 피검사 수치가 정상으로 올라왔다는 말을 건넸다. 약을 투여한다고 체중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며, 근육량이 줄어들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힘들어도 몸을 움직여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엄마는 휠체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 이렇게 휠체어를 타고 왔는데 무슨 운동을 할 수 있겠어요?”
동정의 한 표를 기대하는 말투였다. 하지만 의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걸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화장실, 거실, 부엌. 그만큼은 걷고 계시잖아요. 거기서 조금만 더 걸으면 됩니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의사 선생님은 도와주는 사람이다. 엄마의 몸을 책임져 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진료가 지연되고 있었고, 더 이상의 질문도, 대화도 멈춰야 했다.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혼자 TV를 보고, 화투 친구가 생기면 깔깔 웃으며 농담도 잘한다. 아프다는 말과 달리, 일상의 순간들은 제법 활기차다. 그러나 움직이는 운동만큼은 극도로 싫어한다. 모든 의사와 가족이 운동을 권하지만, 엄마는 듣기 싫은 소리는 흘려보내고, 시키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모든 불편함을 다이어트약 탓으로 돌리며 자신의 몸 상태를 설명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스스로 몸을 돌볼 대안은 없다. 먹고 싶은 것은 먹고, 몸이 안 움직일 때는 도움을 받고 싶고, 아프면 약으로 해결하고 싶다. 걷지 못하는 자신을 동정의 눈으로 봐주길 바라는 마음도 읽힌다. ‘오죽하면 그러겠냐’는 말을 수없이 듣는 상황 속에서, 엄마는 점점 자신의 아픔을 증명해야 하는 사람처럼 되어 간다.
어른의 뇌는 이렇게 변해 가는 것일까.
우리는 점점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가는 걸까.
요즘 나의 가장 큰 고민이다. 순간의 편안함이 평생의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하면 상처 없이 전할 수 있을까. 건강하게 오래 함께하고 싶은 이 마음을, 엄마는 과연 알아줄까.
그래서 편지를 쓴다.
엄마.
요즘 엄마를 보면서 내 마음에 가장 자주 드는 생각은
“엄마가 오래, 건강하게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야.
엄마가 힘들어서 약에 의지하게 되는 거,
그 마음을 나는 이해해.
아프고, 지치고, 불안할 때
조금이라도 편해지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아니까.
그런데 말이야, 엄마.
나는 지금의 편안함보다
앞으로의 시간이 더 소중해.
5년 뒤, 10년 뒤에도
엄마랑 같이 밥 먹고,
같이 걷고,
같이 웃고 싶어.
아프지 말고,
덜 힘들게,
천천히 오래 같이 살고 싶어.
그래서 잔소리가 아니라,
딸의 욕심으로 이 말 전해.
엄마는 내 삶의 뿌리야.
엄마가 건강해야
내 마음도 편해.
사랑해, 엄마.
그리고 정말 고마워.
글을 쓰면서도, 이 마음만큼은 엄마가 꼭 알아주었으면 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옆에서 응원해 주고 간절히 바라고 있을 때 함께 노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진실은 쓰고, 거짓은 달다’는 말이 있다. 쉽게 가는 길은 누구나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건강은 늘 어려운 쪽을 선택하는 사람에게 오래 남는다. 약에 의존하되, 엄마의 몸을 제대로 이해하고 천천히 줄여가는 방법을 함께 찾아가고 싶다. 전문가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행동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총명하고 사려 깊은 엄마가 이제는 자신의 몸을 위해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부모를 모시며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함께 산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그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며, 사랑과 분노, 연민과 좌절이 동시에 밀려오는 감정의 반복이다. 특히 부모가 의사의 말을 따르지 않고 약에 의존하려 할 때, 자녀의 마음은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부모의 고집 앞에서 우리는 자주 무력해진다. 왜 말을 듣지 않는지, 왜 같은 설명을 수십 번 반복해야 하는지, 왜 위험을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답답해진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바꾸어 보면, 그 선택의 바탕에는 고집이 아니라 두려움이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아픔에 대한 공포, 늙어간다는 불안, 몸이 말을 듣지 않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그리고 자식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 이 모든 감정이 쌓여 결국 ‘지금이라도 편해지고 싶다’는 선택으로 이어진다. 약에 대한 의존은 나약함이 아니라, 버텨내기 위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설득은 늘 실패한다. “의사가 그렇게 하랬잖아”, “그러다 큰일 나”라는 말은 옳지만, 부모의 마음에는 닿지 않는다. 오히려 통제받는다는 느낌, 무시당한다는 감정만 키운다. 그 순간 대화는 관계의 언어가 아니라 권위의 언어가 되고, 부모는 방어와 고집으로 맞선다. 결국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의사’의 말이 아니라 ‘자식’의 마음이다.
“엄마가 오래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이 한마디는 어떤 의학적 설명보다 깊이 스며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를 관리 대상이 아니라 삶의 동반자로 바라보는 태도다. 통제의 시선은 갈등을 낳고, 동행의 시선은 변화를 만든다. 같이 병원에 가고, 질문을 정리하고, 기록하며, 함께 걷는 시간 속에서 부모는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 안도감은 약보다 강한 치유가 된다.
부모를 모시는 자녀는 늘 죄책감 속에 산다. 더 잘하지 못한 것 같고, 화를 낸 순간이 후회되고, 지친 자신이 못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간병인이 아니라 자식이다. 완벽할 필요도, 늘 강할 필요도 없다. 흔들리고, 지치고, 울어도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 있어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부모를 모신다는 것은 결국, 오래 함께 살아가기 위해 오늘의 불편을 감내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불편 속에는 깊은 사랑이 숨어 있다.
“엄마, 나는 엄마가 오래 살아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