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라는 고통스러운 축복

by 또 다른세상

칼자루를 쥐는 법: 퇴고라는 고통스러운 축복

사람을 얻는 지혜 / 발타자르 그라시안 / 현대지성

6부 이 세상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다.

평정심

224. 각도가 다른 빛으로 보면 같은 것도 아주 다르게 보인다.


빛의 각도가 바뀌면 사물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익숙했던 풍경도 어떤 빛을 받느냐에 따라 낯설거나 경이로워진다. 기회 역시 마찬가지다. 기회가 올 때 그것을 어떻게 붙잡느냐가 본질을 결정한다. 모든 사태에는 양면이 있다. 날카로운 칼날 쪽을 잡으면 제아무리 좋은 기회라도 상처를 입힌다. 반대로 가장 해로운 상황일지라도 안전한 칼자루 쪽을 쥐면 스스로를 보호하는 도구가 된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는 '거스러미'를 잡지 않고, 사물의 정당한 손잡이를 찾아내는 안목이 필요한 이유다.

초보 작가 넷이 모여 초고 작성을 계획했다. 11월, 마침내 초고가 마침표를 찍었다. 메신저 단체 대화방에 퇴고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를 공유한다. 홀로 마주한 퇴고의 시간은 혼돈 그 자체다.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문단의 배치부터 주제와 메시지의 일관성까지 신경 써야 할 갈래가 너무도 많다. 글 전체의 흐름을 짚어보다가도 '이것이 과연 주제와 연결되는가', '중심축을 놓치지는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처음 가보는 길을 지도 없이 걷는 위험천만한 산행과 같다. 분량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들쑥날쑥하다. 실험적인 시도였다고 자위해보지만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투고할 출판사들의 이메일 주소를 수집한다.


투고 양식은 제각각이다. 그중 양식이 간결한 곳을 골라 기획서, 서문, 맺음말, 본문을 정리한다. 정성껏 꾸린 원고를 메일함에 넣고 발송 버튼을 누른다. 보내자마자 접수 확인 자동 회신이 도착한다. 신기한 경험이다. '초보 작가들의 시작이 이토록 간단한가' 하는 생각에 설렌다. 인정받는 작가가 된 듯한 기분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투고한 세 곳의 출판사—마음산책, 휴머니스트, 다산북스—중 마음산책은 묵묵부답이다. 다산북스와 휴머니스트는 접수 확인 이후 정중한 거절 의사를 밝혀왔다.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음에도 입 안은 써 내려간다. 기획 출판의 문턱은 높고, 사비가 들어가는 자비 출판을 고민하니 다시 주저하게 된다. 출판을 향한 활기찬 흐름은 멈춰버렸고 시간만 야속하게 흐른다. 답답함이 극에 달한 어느 날, 스승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이 험난한 과정을 혼자 감당하려 하느냐는 꾸짖음이 돌아온다. 바쁜 일정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배려였으나, 스승에게는 그것이 서운함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글쓰기 수업의 진정한 완성은 출판까지의 전 과정을 함께하는 데 있다는 가르침을 다시 새긴다.

스승에게 보낸 초고는 이틀 만에 정성 어린 조언이 되어 돌아왔다. A4 용지 세 장을 가득 채운 피드백을 한 문장씩 곱씹는다. 제목과 목차부터 문맥, 주제, 맞춤법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허술하지 않은 곳이 없다. 아쉬움이 짙게 배어 나오지만, 글쓰기 여정에서 가장 소중한 이정표를 얻은 기분이다. 다시 읽어본 초고는 도저히 완성본이라 부를 수 없는 수준이다. 퇴고가 아니라 초고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손봐야 할 지경이다. 마음이 급해진다. 집안일에 짜증이 늘었던 이유를 비로소 발견한다. 글에 대한 강박과 조급함이 일상의 여유를 갉아먹고 있었던 셈이다. '그랬구나' 하고 수긍하며 다시 글을 읽는다. 과거의 기억 속으로 침잠하며 때로는 웃음 짓고, 때로는 마음 아파하며 활자 사이를 유영한다.

스승이 제시한 기준에 맞춰 하나씩 수정해 나간다. 기준에 맞추려 애쓸수록 글은 처음보다 정교해지지만, 자꾸만 손길이 멈춘다. 흐름이 깨진 것은 아닌지, 부족함 때문인지 아니면 지나친 욕심 때문인지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한다. 퇴고가 이토록 불편하고 괴로운 것은 결국 불안정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완벽해지려는 욕심을 내려놓는다.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는 자세로 자세를 고쳐 잡는다. 한 걸음씩 내딛는 걸음마가 세상을 향한 큰 보폭의 시작임을 믿는다. 책상 앞에 앉아 흩어진 활자들을 다시 모은다. 칼날이 아닌 칼자루를 쥐기 위해, 빛의 각도를 달리하며 진실한 문장을 길어 올리는 고된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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