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1)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는 멀티버스라는 장르를 택한 것이 신의 한 수다. 마치 메타버스가 에에올을 위해 태어난 듯 이렇게 찰떡인 영화는 처음이다.
사실 처음 1시간 동안은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때 스트레칭을 막 시작하지 않았고, 다음 날도 쉬는 설 연휴가 아니었다면 아마 버티지 못하고 꺼버렸을 거다. 구매해서 본 것도 아니었으니 정말 껐을 거다. <킹스맨> 스타일의 연출, 강렬한 B급 영화의 스멜. 영화 초반부에서 느낀 것은 그게 다였다. 이거 샹치아냐? 뭐야, 또 이마에 눈알이야? 하면서 1시간 동안 영화를 향해 냉소적인 시선을 보냈다.
영화 내내 죽음을 가볍게 다루는 장면이 나온다. 사지를 비틀고, 던지고, 목을 꺾고, 배를 찌르고... 잔인한 영화라기 보다는 반대로 죽음을 매우 가볍게 다루는 영화. 이런 걸 보고 웃는 걸 정말 질색하는 편이라 머리를 자른 자리에서 꽃들이 팡팡 터졌을 땐 자꾸만 입에서 욕이(진짜 꽃...) 나오려 했다. 하지만 내가 바보가 될수록 좋은 작품에 대한 충격은 세게 오는 법이다.
"다 보이는구나, 다 보이는 거야. 세상 모든 건 진동하며 중첩하고 있는 미립자의 무작위한 재배열에 불과하다는 걸"
"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다른 가능성의 바닷속으로 휩쓸려 사라질 뿐"
"하나의 우주 속에 그 모든 게 존재하지만, 그조차 무수한 우주 중 하나일 뿐이야. 뭔가를 발견할 때마다 반증하는 셈이지. 우리가 하찮고 어리석다는 걸. 다음엔 또 어떤 새로운 발견이 우릴 개허접한 쓰레기로 느끼게 해줄까?"
조이가 자신의 여자친구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모습, 신체 일부를 잘라냈는데 그 부위에서 꽃들이 터져 나오는 장면, 조이가 조부 투바키가 되어 휘황찬란한 착장을 계속 바꿔 입고 나오는 모습들, 엄마가 찾아가는 쿵후 세상, 소시지 손가락 세상, 바위 세상, 인형 세상을 비롯한 모든 우주들, 그 우주로 가기 위해 하는 행동들. 이 모든 것이 멀티버스를 골랐기에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규칙 삭제’ 연출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옷이 아닌 것 같은 옷을 입고, 나오면 안 될 것 같은 곳에서 튀어나오는 모든 불규칙들, 모든 상관없음. 멀티버스 세계관이 가진 가장 큰 장점. ‘다양함’. 이것만으로 이미 이 영화는 멀티버스를 다 내려 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시간이 지나고 점점 영화의 메시지가 선명해졌을 때 내가 싫어하던 초반 연출들은 전부 소름으로 다가왔다. 그 모든 불규칙들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조부 투바키가 아무리 광대 같은 분장을 하고 나와도, 자꾸만 소시지가 튀어나와도 이제 받아들였다. 이유가 명백한 연출이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베이글과 바윗덩이도, 소시지 손가락도 이제 슬프고 애틋하다.
"우리 그만 싸우면 안 될까요? 다들 무섭고 혼란스러워서 싸우려는 거 알아요. 나도 혼란스러워요.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거라곤, 다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나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땐."
칼에 찔리고도 아내를 보호하며 ‘다정해야 한다’는 남편의 대사는 첫 번째 오열 포인트였고, 그래, 세상에 다정함이 전부지. 그럼 뭐겠어. 작가가 답을 잘 알고 있구나 생각했다. 결국 무너지는 주인공들의 자조적인 모습에 또 함께 무너지고, 염세적으로 끝나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다. 몸이 바위라 붙잡지 못해도 같이 떨어질 수는 있다. 잡을 손이 없어도 자식 없이는 못 살아 함께 떨어진다. 영화는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신과 같은 능력을 주인공에게 부여해놓고 잔인하게 가족으로 발목을 잡는다. 이 영화가 모성애만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라지만(너무 뻔한 레퍼토리니) 그 수많은 우주를 뚫고도 왜 결국 다시 돌아오고야 마냐는 질문의 답 속에 엄마가 있다면, 자식이 있다면. 거부할 수 없지 않은가. "네가 그 모든 소음을 뚫고 날 찾아다닌 이유"는 조부 투바키가 엄마에게 '세상 모든 건 다 부질없어'라고 설명하기 위함이었겠지만, 실은 자신을 지지해 줄, 안정감을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자리잡을 곳, 그곳이 엄마였으니까. 이 영화는 모성뿐 아니라 자식이 엄마를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도 읽어 내야 하는 것이다.
"난 어디든 갈 수 있는데, 뭐한다고 너랑 여기 있겠니? 그래, 네 말이 맞아. 말이 안 되지. 어쩌면 니 말대로 그 뭔가가 있을지 모르지. 우릴 하찮은 쓰레기로 느끼게 해줄 새로운 무언가가. 네가 그 모든 소음을 뚫고 날 찾아다닌 이유를 설명해 줄 무언가가.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난 너랑 여기 있고 싶어. 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너와 여기 있고 싶어."
"그래서 뭐. 나머지 문제들은 다 무시할 거야? 뭐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잖아. 왜 그런 곳으로 가지 않는 거야? 이곳은 그래봐야 상식이 통하는 것도 한 줌의 시간뿐인 곳이야."
"그럼 소중히 할 거야. 그 한 줌의 시간을."
조부 투바키는 강하다. 조부 투바키를 이기기 위해 양자경은 수많은 우주에서 가장 강한 자신의 능력을 끌어온다. 하지만 결국 모든 우주의 강함을 다 가지고 오더라도 세상의 어떤 강함도 내 우주를, 내 삶을 지키기 위해 강해진 지금의 나만큼 강하진 못하다. 그러기로 결정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더 행복해질 거다. 어떤 우주를 다 가지고 와도, 사실 다른 우주를 가지 않고 이 우주에서도 조금만 다른 선택들을 하면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누군가의 엄마로나 누군가의 자식으로 살지 않아도 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살아서 반드시 행복해지고야 말 것이다. 내게 이 능력을 준 누군가가 있는 듯이, 그에게 보란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