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려진 나를 되찾는 방법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

by 이리

‘타자’와 ‘나’의 경계가 흐려지는 환경에서 ‘나’를 정의하고, 구별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환경에서 콘텐츠들이 매번 외치는 ‘그럼에도 나’라는 메시지가 여전히 유효한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나’는 얼굴, 사는 곳, 성격과 능력, 사용하는 언어 등 모든 것이 달라도 ‘나’라는 존재로 수많은 우주에 존재한다. 이 세계관에서 우리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지만 동시에 나와는 다른 우주의 ‘나’(스스로)에게 질투를 느낀다. 이건 나일까, 내가 아닐까.


이렇게 혼란 속에 흐려진 나를 보여주는 작품은 <에에올> 뿐만이 아니다. 지난번 리뷰한 넷플릭스 영화 <정이>도 마찬가지고, 내가 처음으로 뇌복제를 목격했던 미드 <원헌드레드>도 영생을 위해 겉모습을 바꾸는 ‘나’를 보여준다. 겉모습이 바뀌어도 나를 나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본인은 그렇다 쳐도 주변 사람들은? 드라마 <환혼>에서는 주인공의 겉모습이 바뀌지만 다시 서로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보는 시청자들은 몰입이 어렵기도, 혼란스럽기도 했다. 배수아 작가의 소설 ≪훌≫ 속 주인공 세 명의 이름은 모두 ‘훌’이다. 나를 대표하고 서로를 구분 짓는 ‘이름’이라는 것이 없어진 상황에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나를 정의하는 것들이 사라지고, 바뀐 환경에서 ‘그럼에도 나’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일까. 흐릿해진 경계에서 무엇으로 나를 타인과 구별하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 계속 인식할 수 있을까.


지금의 콘텐츠들은 역설적으로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흐리게 만든 뒤 ‘나’를 부각시키는 연출로 ‘그럼에도 나’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인간에 속해 있는 존재이고 영화 속 주인공에 편승할 뿐 현실의 배경이 점점 더 혼란스러워진다면 나를 나로 구분할 것이 없어진 환경에서 나와 타자의 경계는 완전히 흐려지고 만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나'라는 메시지가 언제까지나 유효하지는 않을 것이다.


구병모 작가의 소설 <상아의 문으로>에는 꿈에 잠식당해 나를 나라고 '믿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진여의 삶이 담겨있다. 흐려진 나를 믿음으로 유지하는 상황. 그 상황에서 진여는 내가 누구인지 수없이 고민한다. 꿈속에서 늘 그렇듯이 몸이 보이지도, 상황과 시간에 속하지도 않는 나를 뭐라고 정의 할 수 있나. 작가는 ‘누군가가 내 꿈속에 있듯 나도 누군가의 꿈속에 있는 사람’이지 않냐는 메시지를 던진다. 결국 모든 꿈의 겹을 벗어도 나는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처음 한 겹이 시작된 순간에도 그 겹과 그 겹의 속은 ‘나’라고 할만한, ‘타인과 나를 정확히 구별할 유일한 뭔가’라고 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나라는 건 ‘층’이 쌓인 게 아니라 ‘색’이 섞여 만들어진 게 아닐까. 색의 경계가 흐려진다는 게(결국 전부 섞여 검정색이 되는 건 안 좋은 것이겠지만) 아주 예쁜 색으로 잘 섞어 나를 다시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면. 지금까지의 나의 삶은, 아니 앞으로도 바뀔 나의 삶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수많은 나와 비슷한 존재들 속에서도, 내가 질투할 만큼 완전히 다른 예쁜 색이 만들어진 존재들 속에서도 색이 아니라 색이 만들어진 역사를 사랑해버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색이 바뀔 때마다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미워하고 반복한 ‘색과의 정’이 결국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을 또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선택으로 이끈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나’를 정의하는 것은 시간이고 역사다. 현재가, 결과가 아니라 흐름 속에 있다. 지금의 나를 선택하는 것은 또다시 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영화에선 결국 내가 살아온 인생, 내 선택으로 만든 자신의 인생사와 그 과정에서 생긴 사랑하는 사람들을 선택한다. 고통이든 행복이든, 좋은 결과를 가져온 선택이었든 나쁜 결과를 가지고 온 선택이었든 모든 것이 내 인생이니까. (삶의 가장 기쁜 순간을 반복하기 위해서라면 가장 추악한 순간마저 얼마든지 되풀이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가 되어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한번!”_허지웅≪살고 싶다는 농담≫_p.172)


결국 우리는 흩어졌다 뭉치고, 흩어졌다 뭉쳐 나를 이해하고, 다시 나에게 적응하는 과정을 거친다. <대학내일 2023 Z세대 트렌드>의 제목은 '더 입체적이고 선명한 나'다. Z세대는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프로필을 하나씩 채우듯 모르는 것이 있으면 거침없이 탐험해 결국 알아낸다. 몰랐던 내 부품들을 전부 꺼내 이름 붙여 다시 조립한 것이 ‘나’다.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행동해도 혼란스럽지 않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언어'도 마찬가지였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말 그대로다. Z세대는 이미 혼돈을 넘어 즐기고 있다.


내가 나인지 모르겠다고, 내가 선명하지 않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다. 구병모 작가가 말하듯, 나라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꿈속에 있는 사람이고 애초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은, 나는, 지구가 그랬듯 수많은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존재라 딱히 탄생에 어떤 거창한 의미도 없지만("다 보이는구나, 다 보이는 거야. 세상 모든 건 진동하며 중첩하고 있는 미립자의 무작위한 재배열에 불과하다는 걸" / "하나의 우주 속에 그 모든 게 존재하지만, 그조차 무수한 우주 중 하나일 뿐이야. 뭔가를 발견할 때마다 반증하는 셈이지. 우리가 하찮고 어리석다는 걸. 다음엔 또 어떤 새로운 발견이 우릴 개허접한 쓰레기로 느끼게 해줄까?") ≪코스모스≫에서는 그렇기(확률) 때문에 우리의 존재가 엄청난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흐려져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라고 정의했던 것들이 사라지면서 내가 나이기에 보지 못했던 스스로의 나쁜 점들과 내가 가졌던 자부심, 반대로 장점까지도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다른 존재들의 고통이 보이고 내가 가졌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변한다.



"어느 날 심심해서 어느 베이글 위에 모든 걸 올렸지. 모든 걸. 내 모든 꿈과 희망, 옛날 성적표, 개의 모든 품종, 인터넷 구애 광고, 참깨, 양귀비씨, 소금. 그랬더니 알아서 붕괴하더라고. 세상 모든 걸 베이글 위에 올리면 이게 되거든, 진실."


"진실이 뭔데?"


"다 부질 없다는 거지."


"조이, 그걸 믿는 건 아니지?"


"기분 좋지 않아? 다 부질 없는 거면.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 한 괴로움과 죄책감이 다 사라지잖아.

빨려들어갔네, 모두. 베이글 속으로"



조이가 혼란에 잠식당했던 이유는 hyper empath(https://www.latimes.com/entertainment-arts/awards/story/2022-12-05/stephanie-hsu-blends-humor-and-humanity-in-everything-everywhere)였기 때문이었다. 나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의 존재 이유, 그들이 왜 차별받고 고통받는가에 대한 고민, 공감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내가 흐려져 고민하는 사람들은 결국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었을 수도 있다. 왜 그 거대한 베이글을 만들어냈는지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우리는 서러웠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바위만 봐도 눈물이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결국 지독하고 잔인한 삶과 세상이라도 다 내 것이라며 껴안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미련하게 다정한 사람들이니.


앞으로 콘텐츠가 ‘나’라는 존재를 또 어떻게 표현할지, 매번 내용과 전제만 바꿔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지는 않을지 그 한계가 걱정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런 콘텐츠들 덕에 분해와 재조립, 혼돈과 선택 속에서 유영할 기회를 얻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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