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 보는 드라마 두 편

이재, 곧 죽습니다(하병훈) / 지옥(연상호)​

by 이리

이재, 곧 죽습니다(하병훈) / 지옥(연상호)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는 자살한 주인공(최이재)이 저승사자를 만나고, 저승사자의 벌에 의해 다른 사람의 몸으로 다시 살고 죽는 것을 12번 반복하는 이야기다. 그러니 이 드라마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경험한 자가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를 말하고자 한다. 12명의 몸으로 다시 살고 죽고를 하고 나면 무엇을 알게 되는지에 대해서. 또한 동시에 그것을 왜 우리가 취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지옥>은 시즌 2까지 나왔다. 배우는 중간에 바뀌었지만 이 작품의 논리는 변덕이 없다. 지옥의 사자가 나타나 사람을 3분간 패고 태워서 지옥으로 데려가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 세상.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단순히 판타지 재앙물로 본다면 여기서 그치겠지만 작품은 그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괴물이 갑자기 나타나 인간을 죽였다.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종교가 대신 설명한다. 그중 새진리회 교주인 '정진수'라는 인물이 하는 말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따라서 정진수의 사상이 이 세계관의 메인 사상이 된다.


"사람들은 공포를 알아야 돼. 죄에 대한 공포, 죄를 지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 공포가 인류를 구원할 거예요."


잘못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공포에 빠지면 죄를 짓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을까? 잘못을 하면 정말로 지옥에 간다고 말이다. 이것이 정진수의 사상이다. 수치심과 죄의식, 이 감정들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둔다. 실제로 일어난 현상은 '괴물이 사람을 죽였다'뿐이었지만 정진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정진수 의장의 의도에 따라 사람들은 사자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은 죽을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게 된다. '죄'의 범위도 해석에 따라 차츰 넓어져 '방관도 동조죄'라는 진리가 더해진다. 지옥사자가 오지 않아도 사람들은 미리 서로를 물고 뜯는다. 감시하고 긴장한다. 즉 재앙을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종교의 교리(사상)가 더해져 죄의식(공포)이라는 감정이 지나치게 강화되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이 이 작품의 본질적인 내용이다. 배경은 현대이므로 정보의 시대, 커뮤니티 활성화와 빠른 공유 환경에서 오는 사적 제재의 무차별성도 함께 다루고 있으며, 통제되지 못한 사적 제재의 범위는 많은 이들의 삶을 파괴한다는 현실성이 따라간다.


정진수는 종교를 남기고 사라진다. 그 뒤로 사적 제재의 쾌락을 느끼는 사람들, 정의 구현을 바라는 사람들, 정치인 등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이 현상(사자가 사람을 죽였다)은 더욱 다양하게 해석된다. 실은 자연재해와 다름없이 누구에게나 오는 무차별적인 재앙일 뿐인데도. 현실에도 자연재해를 여러 갈래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드라마는 그것을 극단적으로 설정해서 믿는 사람의 수를 절대적으로 표현하고 그로 인해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담는다. 여느 작품과 같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세계관이 제작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화한다.


후반부에서는 지옥사자에게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돌아온 박정자와 정진수의 행보에 따라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진다. 박정자와 달리 정진수는 재생된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괴물이 된다. 같은 재앙을 겪었어도 각자가 다른 지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인데, 박정자가 가진 것과 정진수가 가지지 못한 것, 그 차이와 함께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재앙 속에서(이런 상황 속에도 믿음과 사상, 신념을 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은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이재, 곧 죽습니다>에서 12명의 삶을 살고 죽기를 반복해서 이재가 깨달은 것, <지옥>의 정진수처럼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가져야 할 태도. 이 두 작품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두려움에 대한 것이다.


"두려움에 떠는 인생은 진짜 인생이 아니다." - 이재, 곧 죽습니다

"당신이 겁쟁이였기 때문이야." - 지옥


죄책감을 일부러 우리에게 밀어 넣는 작품도 많다. 정진수의 실험도 극단적이었지만 일리가 있다. 무지도 죄라는 말처럼 공포에 깨어있지 않으면 인간은 알게 모르게 죄를 지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의 자기반성도 하지 않는다. 마치 사자가 지금까지의 얼룩말 잡아먹기를 반성하고 남은 생을 풀만 뜯어 먹으면서 살아가기로 결심하지 않는 것처럼.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강유원, 《책과 세계》) 책을 읽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아는 자만이 자기반성을 하고 살아가기에 이 세상이 여전히 불편할지 모른다. 모두가 반성을 하고 긴장하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정말 더 건강해질지 모른다. 다만, 이런 공포는 쌓이고 삶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공포를 어디까지 느끼고 어떻게 다루며 살아가야 하는가 까지는 설명하지 않지만 두 작품은 두려움이 무엇을 갉아먹고 어떻게 삶을 파괴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유추할 수 있다. 공포에 빠지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사는 법.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방법.


얼마 전 다시 본 지브리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에게는 특별한 강인함이 있다. 내게 중요한 것 외에는 돌아보지도, 마음을 쓰지도 않는 강인함. 타인을 미워하고 복수하는 데 생을 쓸 틈은 없다는 듯. 자신의 목적과 목표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손쉽게 정리하고 앞으로만 나아간다. 앞으로만 나아간다는 것은 사랑에 온 마음을 쏟는다는 것이다. 고민이나 걱정 없이 돌아오는 기차표를 남기지 않고 자신을 괴롭힌 신에게 선뜻 내어주고 부모님께 드릴 쓴 경단을 눈앞의 신을 살리는 데 쓴다. 못된 짓을 한 마녀의 잠자리를 돌봐주고 가족으로 받아준다. 다 무너진 집을 다시 청소한다. 새로 시작한다. 자기 자리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주변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강인함이고 용기가 아닐까. 두려움에 빠지면 나 자신을 잃는다. 두려움에 빠지면 그간 정의된 나를 잃는다. 주변의 사랑과 주변을 향한 나의 사랑, 생의 행복과 감사함을 잃는다.


종교 소재를 다루는 <지옥>은 광신도들의 무서움도 함께 다룬다. 무언가를 새로이 믿고 내 안에 가득 담아내는 것은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더 이상 내가 사랑하던 그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우리보다 다른 것을 더 믿고 있으니까. 이곳이 자기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자기 자신보다 다른 것을 더 많이 믿어서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 자기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박정자의 지옥과 정진수의 지옥이 달랐던 것도 이와 같다. 박정자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고 싶은 원래의 자기 자리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닿을 수 없는 그리움과 같은 지옥에서 빠져나온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모르죠? 막, 막 혼란스럽잖아요"(정진수)

"나는 알아요! 내가 누군지, 나는 은율이 하율이 엄마예요. 그 수많은 세계 속에서 나는 항상 그 아이들 엄마였어"(박정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광신도인 아내(햇살반 선생님)의 남편(천세형)과, 광신도인 딸의 아버지(진경훈 형사). 남편은 아내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내기 위해, 또는 자신이 아내를 이해하기 위해 애쓴다.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생의 남은 날들을 허튼 데 썼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허망하다. 결국 남편이 마지막 순간에 깨달은 것은 신을 향한 원망, 또 다른 지옥이므로.


"알았다. 신의 의도가 뭔지 알았다. 아무 의미도 없는 거에 의미를 부여해서 서로 죽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거야. 거기가 어딘 지 알아? 지옥이야. 신은 지금 지옥을 이 세상으로 옮기려고 한다!"


남편은 자기 자신을 지켜내지 못했고,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지켜낸다. 아픈 딸과의 마지막 순간을 아버지는 허투루 보낼 수 없다. 이 둘의 차이도 작품에서 말하는 메시지를 좁힌다.


"희정이 세상은 채 석 달이 안 남았어요. 그 짧은 시간을 희정이 믿음을 부수는 데 쓸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 두 작품이 말하는 것은, 어떤 것들을 하며 살아가야 하느냐보다는 어떤 것들을 놓고 살아가야 하느냐에 더 가깝다. 무언가를 이루려고 노력하지 않고도 저절로 생긴 사랑과 감사함, 풍족한 마음 같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더 많이 욕심내고 의미를 찾아내고 믿고 담아내느라고 애쓰다가는 생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라고. 허튼 욕심을 가지지 말라고.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으라고. 그래서 살고 싶어졌다. 사랑 하나만 딱 해보라고 하니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나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것도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인간과 우주에 값하는 유일한 예술, 그를 별보다 더 멀리 이끌어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은 〔……〕 에로티즘이다." _앙드레 브르통,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에서 재인용, 87.p


"에로스는 도래할 것을 향한 충실한 마음을 지탱해준다."_ 같은 책 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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