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2023, 11)
영화 <괴물>,
사카모토 유지 각본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모두가 조금씩은 괴물이기에 괴물을 찾는 것은 그 선상에 우리를 놓는 일이다. 죄책감이 여전히 낯선 감정인 우리에게 이는 거부하고 싶은 일이고, 그 거부를 통해 이는 결국 무의미한 일이 된다. 우린 지금까지 더 나쁜 놈을 찾는 데 혈안이었다. 우리 스스로 조금 더 나은 인물이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더 나쁜 놈을 탓하고 원망함으로써 우리는 청렴결백해진 채 영화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 영화가 이번에 우리에게 가르쳐줄 것은 죄책감이다. 조금씩이라도 다 괴물이라고 명확히 지목해 준다. 아직 서툰 우리를 어느 정도 달래가면서. 적당하고 영악하게.
괴물이 누구인지 찾는 일이 이 영화에서 무의미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영화가 우리를 의도적으로 몰아넣어 ‘괴물 찾는 일’을 반성하게 만들기 위한 궁극적인 의도였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우리는 그 대척점, ‘좋은 어른’이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며, 앞으로의 임무로 삼아야 한다. ‘괴물 찾기를 포기하자’는 표어 아래, 그것이 흐려져서는 안 된다. 나는 그것이 이 작품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
숨은 의미가 많은 작품인 만큼, 영화의 요소와 초점이 다양하게 읽힐 수 있고, 중요한 것으로 선택될 수 있다. 그중 내가 선택한 맥락(영화의 주요 메시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캐릭터들 속에 어느 누구도 완벽한 악역이 없다는 것이다. 작품은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타깃을 심고 의심을 키우며 ‘진짜 괴물이 누구인지’ 찾도록 만든다. (시점이 바뀌면서 초면과도 같아지는 호리 선생님을 보면 이는 완벽히 의도적이다.) 처음 3분의 1 부분까지 그 대상은 호리 선생, 중간 지점은 요리와 미나토, 마지막은 요리 아버지와 학생들, 교장 선생님을 괴물로 지목하게 된다. (이는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지목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빠져나왔을 때 우리 손에는 괴물을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메시지’가 들려있지만, 나는 우리가 쌓인 습관(및 심리적으로)이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이 작품의 메시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괴물 지목은 어느 정도 용인되어야 한다고 본다. 작품도 그걸 놓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괴물을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 외의 의도로 말이다.
마지막에 지목된(밝혀진) 요리 아빠, 학생들, 교장 선생님이 진짜 원인이었지만(괴물이라 하고 싶지만 우리 전부가 괴물이라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요 메시지가 흐려질까 ‘원인’이라 청한다) 이들은 영화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 등장한다. 덕분에 효과적으로 미나토의 엄마, 호리 선생이 더 중요하게 비춰진다. 미나토의 생각과 죄책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사람은 엄마다. 호리 선생도 두 아이와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말로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전부와도 같은 엄마에게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정체성이 부정당하고, 이와 반대로 가는 자신에 죄책감을 느낀 미나토는 만만한(어느 정도 원망도 있었을) 호리 선생님을 팔아먹는다. 이 작품에서 호리 선생은 현실의 우리가 보기에 가장 안타까운 인물이나,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줄 유일한 존재이며 자신의 (의도하지 않은) 영향에 대한 벌을 고스란히 받는 인물이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벌을 고스란히, 또는 더 크게 받아도 그 벌의 크기가 살아서 감당할 수 있을 정도라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다)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 작은 것에 눈을 기울일 줄 아는 사람. 뒤집힌 것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호리 선생의 오탈자를 바로잡는 취미와 뒤집히는 물고기에 가지는 연민을 보면 자신의 인생에 은근한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고 인정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깨닫고 성장한다는 해석이 더 맞겠지만 내가 완성한 해석에서 이는 약간 흐린 눈을 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이렇게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포지셔닝한다. 더 악한 가해자의 비강조, 보통의 인물이 저지른 잘못의 나비효과.
관객은 반드시 어느 한 캐릭터에게 감정이입과 공감을 한다. 그 대상은 자신과 가장 닮고, 가장 이입한 상대다. 어느 누구보다 이 둘에 많은 초점이 맞춰지는 만큼 엄마와 호리 선생을 우리와 동일시할 수밖에 없다. 호리 선생의 무죄가 밝혀졌을 때 이는 가장 강해진다. 큰 잘못을 하지는 않았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려 했지만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의심도 한다. 아이들은 이러한 주변의 수많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배우고, 두려워하고, 때로 상처받는다. 엄마와 호리 선생이 가진 보통성이 우리가 이 인물들과 동일시 하는 이유다. 그러면서 우리는 영화의 주인공이자 가해자가 된다. 아이들이 보통의 우리에게 받은 상처는 강조되고 사라지지 않음으로써 면죄부는 쥐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획득한다. 꼼짝없이 붙들린 우리는 조금 더 원망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이 감정의 이름은 무엇이고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누구의 말이 맞고 틀린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자신이 가장 감당하기 힘든 것을 정면돌파하는 대신 다른 선택지를 고를 뿐이다. 자신이 판단하기에 조금 덜 나쁘고 덜 두려운 쪽으로. 아이들의 비밀과 거짓말의 과정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그런 아이들이 결국 정면돌파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최선의 생각이라 여겼던 것은 ‘새로운 시작’이다. 새로운 시작 전에는 죽음이 있다는 사실은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새로운 시작이 더 간절했던 아이들은 폭풍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열차의 첫 칸에 선다. 다른 것들을 바꿀 방법을 어디에도 찾을 수 없고, 그러기엔 너무 어리고 약하기에 자신을 바꾸는 것이 가장 쉽기에 빅크런치를 기다린다. 편견이라는 말이나 자살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리니까. 어떤 상황에서 얼마나 철이 들었든 아이들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리다. 나를 보호하고 숨기는 일이 철이 들었다는 말에 증거라는 듯, 그저 그렇게 할 뿐이다. 그게 그나마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을 테니까.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모르는 존재다. 아이들의 위태로운 순수함보다 잔인함을 더 잘 아는 사람. 과자도둑과 학교폭력 가해자, 거짓말쟁이로 아이들을 정의하는 사람. 작품에서, 특히나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에서 정치성(누굴 원망하고, 어떤 방향으로 가라)이 빠지면 관객도 동시에 혼란에 빠진다. 그에 맞지 않게 이 영화는 ‘괴물 찾기를 포기하라’는 메시지로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지만 분명히 이 애매함과 혼란은 이 작품에서 필요하다. 원망의 화살이 꽂힐 만한 분명한 곳이 있다면 우리는 화살을 그대로 작품 속 캐릭터에게 꽂은 채 그저 안타까운 아이들의 이야기로 보고, 연민과 동정심으로만 감상을 마무리했을 것이다(그리고 그런 영화는 너무 많다). 또한 반대로 영화가 지나치게 우리를 향해 원망의 목소리를 냈다면 아마 영화는 보호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 애매함과 혼란 속에서 작은 화살표(이 사람을 미워하세요)가 되어 주는 것이 교장이다. 더 큰 거짓말을 하고도 느끼는 죄책감은 교장이 더 가볍다. 그가 분 트럼펫의 무게처럼. 교장은 자신의 죄책감을 순수한 아이 옆에서 덜어내고자 아이의 잘못과 자신의 잘못을 나란히 둬본다. 함께 트럼펫을 불며. 그가 아이들의 곁에 있고자 하는 이유가 이거였을까. 자연스러운 의심을 받고 있던 교장은 해명하지 않은 채 우리의 원망을 은근하게 산다. 교장이 손녀를 친 것에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교장이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증거도 없으며, 오히려 반대의 증거는 존재하는 상황. 하지만 이조차도 근거 부족이다. 꼼꼼하고 잔인하게 심어 놓은 나비효과와 그 결론 덕분에 호리 선생과 엄마가 피할 수 없이 가장 큰 원망의 대상이 되고, 그에 동일시했던 우리는 교장 선생님이라는 우리를 보호해 줄 얇은 보호막을 앞에 두고 죄책감이 무엇인지 배운다. 표독한 관객 앞에 표독한 제작자가 있다.
.
이 영화가 그토록 눈물이 나는 이유는, 순수한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아이들의 모습은 귀엽고 아름다운 것으로 봐놓고, 아이들이 그런 선택들을 하는 동안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이해하지도 보호하지도 못하고 의심하고 편견을 쌓아 내밀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이토록 보통의 세상이며, 우리이고, 그들의 전부다. 이 영화의 결말이 새로운 시작과 희망이고 여기엔 주인공들의 성장이 들어있기도 하나, 나는 이 영화에서 그런 게 잘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 어떤 부분도 해결되거나 나아지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잠깐의 계몽으로는 아이들이 느낄 섬세한 감정과 파동을 느낄 수 없다.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릴 일이다.
그래서 더욱 슬프지 않은가. 잘해보겠단 말 하나로는 그 지점이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래서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조급한 마음으로, 멈춰버린 열차의 핸들이라도 꺾어보고 싶어 진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해서 이 작품 속 어떤 어른도, 영화를 본 사람들도 성장과 희망을 보지 않았으면 했다. 적어도 이 영화 안에서만큼은 그건 너무 순식간이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우리의 죄책감을 조금 더 자극하도록 비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 밖의 우리가 더 오래 이 감정을 잊지 않도록. 우리는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만들 필요가 있다. 동성애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불편하게 하는 모든 문제에서 말이다. 아이들의 위태로운 순수함이 비틀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더 오래, 더 많이 미안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