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아무런 긴장 없는 삶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가치 있는 목표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이다.(빅터플랭클)’
교사, 얼마나 긴장감이 팽팽한 삶인가? 빅터플랭클의 수용소에서의 삶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우리네 삶은 참으로 고될 때가 많다.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고 하던데, 과연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가끔씩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 그리고 늘 따라다니는 또 다른 질문은 ‘왜 교사로 살고 있는가?’이다.
내가 선택한 직업은 교사이다. 자의든 타의든 나는 교사가 되기로 선택했다.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은 내가 교사가 되길 바라셨다. 그 당시 나의 꿈은 수학자였다. 수학 공부가 재미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공식을 알아내거나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수학 시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라는 친구의 칭찬에 뿌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친 긴장 때문이었는지 수능성적은 내 마음 같지 않았다. 수능성적이 나온 후, 담임 선생님께서는 ‘수학을 전공하면 돈을 벌기 힘들어. 교대에 들어가렴.’하고 권하셨다. 원서는 썼지만, 그 당시 내가 썼던 대학교에서 ‘후보 O번’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지만, 부모님을 졸라 서울에 있는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을 딱 하루 다녀왔을 당시, 난 교대에서 추가합격 전화를 받았다.
고등학교 때 한 선생님은 “공부한 게 아까우니 재수를 해라.”라고 말씀하셨지만, 또 다른 선생님은 “교대가 좋지. 안정적이고. 교대에 가는 게 좋겠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외삼촌 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가족들의 의견도 달랐다. 교대를 가라는 의견, 공부를 더 하라는 의견이 각기 달랐다. 기적처럼 걸려온 전화를 받고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며 잠에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난, 더 이상 격렬하게 경쟁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좀 편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걸려온 전화가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왠지 하나님의 부르심 같기도 했고, 가정 형편에도 맞는 것 같았다. 결국 교대에 가기로 했다. 그렇게 난, 경상도에 살면서 거의 가 보지 못했던 전라도 땅을 처음 밟았고, 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교 시절, 많이 방황했다. 내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공부와는 달랐다. 물구나무서기, 뜀틀 넘기, 장구 치기, 가야금 배우기 등 팔방미인이 되는 교육을 받았다. 대학 공부에 그리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컸던 시기라 CCC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사역을 전공, 학과 공부를 부전공이라 여기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임용에 떨어지면 어쩌나 불안감 속에서 시험을 준비했고, 부모님께 울면서 전화하기도 했다. 아빠는 그런 딸 때문인지, 평생 안 가던 교회에 갔다. 엄마는, ‘네 아빠가 딸 때문에, 그렇게 싫어하던 교회에 가서 기도도 했다.’며 종종 말하곤 하신다. 아빠의 기도 덕분인지 나는 임용고시에 합격했고, 교사가 되었다.
교사가 되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삶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아이들과 즐겁게 공부하는 모습을 환상처럼 갖고 있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눈을 반짝이며 내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들 마음에 마음이 벅차기도 했지만, 생활지도는 너무 어려웠고, 업무는 잔혹하리만큼 많았다. 게다가 교사 2년 차에 6학년 담임을 맡게 되고, 갖가지 학교폭력을 경험하게 되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웠고 사는 것이 참 괴로웠다. ‘그래도 다 지나간다’는 선배 선생님의 말처럼 그 시간들도 바람처럼 지나가, 어느덧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열심히 애쓰고, 발버둥 치며 좋은 선생님이 되고자 살아왔다. 한 분야를 10년 동안 꾸준히 하면 전문가가 된다던데, 아무리 노력을 쏟아부어도 전문가가 되기 힘든 것처럼 느껴진다. 삶에 전문가가 없듯이, 매일, 매해가 새롭고 어렵다.
성숙을 훈련하기 가장 좋은 곳을 꼽으라면 학교가 아닌가 싶다. 교실 속에서 순간순간 무너진다. 수업 시간이었다. 한 학생이 쪽지를 쓰고 있었다. 쪽지에는 차마 소리 내어 읽기 힘든 욕들이 적혀있었다. 졸업을 앞둔 6학년이라 생활이 흐트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학생들의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생활지도가 버겁다. “OO가 평소에 잘 행동해서, 이번에는 실수라고 생각할게. 다음에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니?”라며 간단히 잘못을 짚고 넘어갔다. 어떤 학생은 교과서를 칼로 파고 있었다. “OO야, 교과서를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는 말에, “어차피 버릴 거잖아요.”라고 당돌하게 말하는 학생 앞에서 난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할 수 있지? 이해할 수 없는 학생들의 행동 앞에, 나의 애씀이 물거품이 되는 듯이 느껴진다.
교사로 살면서 솔직히 쉬운 적이 없었다. 그건 인생 자체도 마찬가지이다. 늘 삶의 과제와 난제를 붙들고, 나의 부족함과 열등감에 허덕이며 살았다. 결핍과 슬픔을 가슴 깊숙이 숨겨둔 채, 밝은 척 미소 띤 얼굴을 가면처럼 쓰고 살아왔다.
‘내가 교사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불쑥 불안감이 엄습할 때가 있다. 점점 학교 현장은 어려워지는데, 교사가 할 수 있는 권한은 별로 없고 의무와 책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듯하다. 그럼에도 난 오늘도 교사로 살아간다. 교사로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일까? 며칠 전, 한 학생이 편지를 주고 갔다.
“선생님, 2학년 때도 너무나 유익한 수업 해주셔서 아직까지 제 최고의 선생님이신데 영어까지 너무 재미있게 가르쳐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선생님 전근 가신 줄 알고 슬퍼했는데 아니어서 너무 기뻤어요! 너무나 감사드리고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휴직 들어가기 전에 담임으로 가르쳤던 학생이었다. 귀엽기만 하던 2학년 아이가 벌써 6학년이 되었다. 영어수업을 하면서 다시 만났는데, 학생의 편지에 마음이 녹았다. 너무나도 힘든 학생들이 많은 시기이지만, 그럼에도 나의 애씀을 알아주는, 내 수업을 좋아해 주는 학생들이 있기에, 계속 나아가는 것 같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더니 교사는 힘들지만, 수업은 재미있다는 내 마음의 소리에, 이 아이러니에 웃음이 난다. 휴직기간 동안 무기력하게 살다가 다시 학교에 돌아오니, 즐거웠다. 내가 하는 이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기뻤다. 학생들이 수업에 재미있게 참여하는 그 자체로 삶이 충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수업하는 그 순간, 학생들과 함께하는 내 모습이 좋았다. 수업이 주는 기쁨과 감동이 있기에, 오늘도 교사로 살아간다.
사실 두려운 마음이 크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진상 민원,’ ‘특별한, 너무나도 특별한 관심과 주의를 요하는 학생’의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아우성친다. 어떤 아이를 만날지, 어떤 학부모를 만날지 모른다. 정말 고난도의 학부모와 학생을 만나면 얼마나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줄 알기에, 교사로 사는 것이 두렵다.
생각해 보면, 모두가 아픈 것 같다. 교사도, 학생들도, 학부모도, 다들 삶의 문제로 아파하며 서로 부딪치며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긴장 속에서, 문제 속에서 살아가나 보다. 그럼에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가치 있는 목표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인 듯하다. 치열한 우리 인생, 때로는 도망치고 싶은 교사의 삶이지만, 오늘도 나는 교사로 살기를 선택하며 그 의미를 찾아 헤맨다. 내가 걸어온 길, 애써온 삶이 교사의 삶이기에 나의 역사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호흡하고 있는 나를 끌어안는다. 불완전하고 여전히 이리저리 흔들기지만, 존엄한 나의 삶을 꿋꿋이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