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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샘 Jun 02. 2024

쉬어가도 괜찮아

끊임없는 배움에 지치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딤후 3:7)     

  성경에 나온 어리석은 여자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지만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여인, 어쩌면 그 여인이 나의 자아상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 안에 참된 진리가 있지만, 난 진리를 세상에서 찾고 있었다. 삶에서도, 수업에서도 나는 세상의 지식을 갈망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세상이 요구하는 능력을 갖춰야 된다는 생각이 나를 압도했다. 철없던 이십 대 신규 시절,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열정이 있었고 사역에 열심을 쏟았지만, 학교생활은 실패와 좌절로 얼룩져 있었다. 그 시절의 고통은 지금도 트라우마처럼 남아 나를 채찍질한다.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세상의 지식과 능력을 더 쌓아야 한다고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쉴 수가 없다. 내면의 공허함, 부적절감, 좌절감, 실패감, 수치심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기에, 이러한 감정들을 느끼지 않도록 능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이십 대 때에는 교과연구 동아리 활동을 하며 밤샘 작업을 하기까지 하면서 더 좋은 교사가 되려고 애썼고, 삼십 대 때에는 대학원을 다니며 밤잠 줄이고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며 공부했다. 그러나, 마흔이 된 지금 여전히 나는 나의 부족함에 치를 떤다.

  특히 수업 시간에 떠들거나 반항적인 태도로 다가오는 학생을 만나면 내가 쌓아왔다고 생각하는 지식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여전히 무능한 나를 마주한다. ‘이 나이가 되도록 학생들 지도를 못하니? 네가 교사야?’ 내면의 실랄한 비판의 소리가 메아리처럼 반복되어 들린다. 이날도 그러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올해는 업무만으로도 벅찬 상황인데, 굳이 수업을 잘해 보겠다고 대만 학생들과 국제교류 수업을 계획했다. 실시간으로 국제교류 수업을 하던 중이었다. 몇몇 남학생이 발표하는 학생 뒤에서 장난을 치고, 수업 분위기를 흐렸다. 대만 학생들을 웃기려고 하는 시도였을 수 있으나, 재미있기보다는 민망했다. “선생님, 국가 망신이에요.” 수업 마칠 때, 한 학생의 말 한마디가 오늘 수업을 대변하는 듯했다. 처절한 좌절감이 몰려왔다. ‘이게 무슨 망신인가? 역시 난, 교사와 맞지 않아.’

  내가 아무리 무서운 표정을 짓고 기선제압을 하려 해도, 내 말이 통하지 않을까? 어째서 난 여전히 교실 관리가 어려울까? 좋은 교사가 되려는 에너지가 사그라든다. 마음이 차갑게 식는다. ‘항상 배우지만 좋은 교사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교육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교실 혁명’ 관련 연수, 2022 개정교육과정 연수, 교육청에서 추진하는 여러 미래교육 연수, 전국적으로 선생님 사이에서 관심이 높은 IB 연수, 각종 연구대회 등 배우고 해야 할 할 것들이 많지만, 이러한 연수나 대회가 과연 나를 좋은 교사로 이끌어줄까? 내가 국제교류 수업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실천했지만, 통제가 안 되는 몇몇 학생으로 인해 수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례를 생각해 볼 때, 새로운 교육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좋은 수업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디지털 매체를 다루는 탁월한 능력이라든지, 교육과정을 꿰뚫는 능력이 있어도 학생들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면 수업은 모래 위에 지은 성이 되어버린다.

   학생 관리가 어려운 내 약점을 보완하고자 이리저리 배움을 찾아 헤맨다. 하루도 쉴 수가 없는 나에게 경고의 소리가 들린다. ‘둥, 둥, 둥,’ 귀에서 심장소리가 들린다. 스트레스로 인한 이명이다.


나의 약점의 뿌리

  난 수업의 본질은 관계이고, 대화라고 생각한다. 의미 있는 관계 속에서 학생들은 대화를 통해 배움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내가 ‘인간관계’에 취약하다고 생각하는데, 수업에서 끊임없이 학생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해야 한다. 난 보통 인간관계에서 ‘을’의 위치를 자처하기 때문에 이러한 패턴이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 주도성을 잃는 듯하다.

  그렇다면 난 왜 ‘을’의 위치를 자처하는 것일까? 먼저는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내가 내 주장을 했을 때 겪어야 하는 갈등을 회피하고 싶은 것이다. 착한 사람으로 보여 사람들에게 수용받고 싶은 것이다. 과거에 느꼈던 거절감의 아픔이 너무 크기에, 나의 욕구를 희생하고 타인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은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내가 나를 못 믿는 것이다. 내가 하는 판단, 생각이 틀릴 수 있고, 실수할 수도 있기에, 타인의 의견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의견을 자주 물어보는 편이다. 이러한 나의 태도가 타인이 나를 만만하게 보는 빌미를 제공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를 보호하고자 한 행동이, 오히려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형성하고 나를 더 아프게 한다.


다시 성경으로

  성경에 나와 비슷한 여인이 나온다. 난, 이 여인의 이야기만 나와도 눈물이 난다. 그 여인은 바로 사마리아 여인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천대받았을 여인, 남편에게서도 참된 안정감을 얻지 못하고 공허함과 갈급함에 시달리는 여인, 이 여인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곤 한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의 상황을 직면하게 한다. 어쩌면 여인의 갈망과 고통의 근원을 직면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있어서 남편에 해당하는 가치는, 갈망하는 샘물은, 세상의 성공과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이었던 것 같다. 성공적인 교사가 되고 싶었고, 학생들에게 좋은 교사로 인정받고 싶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짓밟히는 듯 느껴질 때가 있다. 교사로서 실패한 듯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의 존재 가치가 먼지처럼 스르르 날아간다.

  세상에서는 ‘성공’을 말하지만, 세상의 기준에 다다르려고 아무리 애쓰고 애써도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성공의 기준을 제시하고, 나는 쉼 없이 이를 향해 달린다. ‘디지털 전환의 시대이니만큼 에듀테크는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해’, ‘카리스마가 있어 학생들 지도에 탁월한 교사가 되려면 생활교육 연수를 더 열심히 받아야 해’ 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그런데 이제는 번아웃이 온 것 같다. ‘주님, 이제 버티기가 힘들어요.’ 어지럽다. 현기증으로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고단하고 지친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다. 예수님에게는 사마리아여인의 어떠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마나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든, 어떤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든 말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와 만나 주셨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고 싶어 하셨다.

  다시 내 삶의 본질을 찾아간다. 수업에서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지만, 나의 연약함과 분투하며 매일을 살아가지만, 먼지같이 날아가버릴 듯한 나의 존재의 가벼움에 괴로워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주님은 찾아오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로 초대하신다. 내가 좀 많이 부족하면 어떤가?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 어떠한가? 그럼에도 난 주님께 수용받고 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시는 그분의 날개 그늘 아래 내 영혼이 쉼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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