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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샘 Apr 20. 2024

내면의 빛을 찾아서

마음의 그늘 속에서    

  7년째 머물던 학교를 떠나 새로운 학교로 왔다. 새로운 학생들, 새로운 동료 선생님들, 새로운 업무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꽤 어려웠다. 학교를 옮길 때, 실질적으로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선택지는 ‘6학년 담임’, ‘혁신부장’, ‘생활부장’이었다. 6학년 담임과 생활부장은 내 역량 밖이라는 생각이 들어 선택하게 된 혁신학교 혁신부장 일은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전학년 담임교사의 업무 제로화인 학교에서 업무지원팀으로 일하려니 일은 해도 해도 끊이질 않았다.

  난 생활지도가 굉장히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업무가 많은 것도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담임을 맡은 때에는 생활지도로 정신이 없어 화장실 갈 시간이 없었는데, 지금은 일을 처리하느라 화장실을 가는 시간도 잊고 일에 파묻혀 지내고 있다. 감당할 정도의 일을 할 땐, 즐겁게 생활할 수 있겠는데, ‘이건 내 역량 밖이다’ 할 정도로 일이 몰려오면 심신이 피폐해지곤 한다. 무엇보다 내가 한 실수를 곱씹게 되고, 나의 언행을 돌아보며 혹시나 누군가가 내 행동으로 인해 불편해 하지 않을지 눈치를 보기도 한다.

  전문성은 실천과 성찰을 통해 온다는데, 요즘 난 성찰이 아닌 자책을 하고 있다. 끊임없는 자책의 뒤에 따라오는 것은 ‘부적절감’이다. 깊이 사유할 힘도, 멀리 바라볼 있는 시야도 잃은 채, 하루하루 꼴딱거리며 살다가 집에 돌아오면 자책과 후회로 눈물짓는다. 고단한 학교의 일상이 마무리되면, 집에 오자마자 저녁을 대충 해결하곤 기절하듯 잠에 들곤 한다. 

  교사가 된 지 17년째이고, 실 경력 14년차 교사임에도 늘 나는 부족한 것 같은 마음은 왜일까? 타인의 삶을 보며 내 삶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어리석은 비교를 하며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이렇게 매일 매일 부적절감에 허덕이며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적절감의 뿌리를 찾아     

  “자신을 싫어하는 것에서 모든 비극이 시작된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한 영상을 보게 되었고, 한 정신과 의사의 말이 뇌리에 꽂혔다. 난 왜 늘 내가 부적절하다고 느낄까? 생각해 보니, 내 자신이 스스로를 부적절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판단의 기준은 외부의 부정적 평가였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를 비난하거나, 흉보거나, 무시하는 사람은 예전보다 많지 않다. 그러나 작은 자극에도 나는 지나치게 타인의 눈치를 본다. ‘저 분 표정이 왜 좋지 않지? 내가 뭐 잘못했나?’ ‘혹시 내가 실수해서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닌가?’ 등 혹여나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을까 하여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리고는 쉽게 지쳐버린다.

  부모님은 날 무척 사랑하셨고, 날 아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내 기억 속에는 날 거절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이제 그만 잊어도 좋을 그 부정적인 말들을 되뇌인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나는 나를 싫어하는 소수의 말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 사람들의 평가로 내 가치가 좌지우지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타인의 마음에 들려고 지나치게 순응적으로 행동한다.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 어렵다. 

  또 다른 부적절감의 원인은 비교이다.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자꾸만 나를 타인과 비교하며 내 가치를 매긴다. ‘주님 안에서는 존재만으로 충분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잖아?’라며 세상이 박수치는 그 모습을 정신없이 쫓아간다. 그러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내가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처럼 비참한 기분이 든다. ‘난 부족해.’라며 부적절감에 시달린다.

  내 존엄성을, 내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기에, 자꾸만 외부에서 인정과 사랑을 갈구했던 것 같다. 외부에서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했고, 그들의 평가와 말이 중요했다. 학교를 옮긴 후 새로운 환경에서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었고, 혹여나 작은 실수라도 하면, 세상이 무너질 듯 두려움을 느꼈다. 두려움의 원인은 나였다.

  내 욕심만큼 따라주지 못하는 나,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데에는 부족한 나, 내가 원하는 만큼의 경쟁력이 있지 않은 나, 이런 모습을 난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면의 빛을 찾아서

  ‘난 부적절하다.’며 울고 있는 나를 마주한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다. 무한 경쟁 속에 내달리며, 몸도 마음도 지쳐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누군가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길 바랐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조차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길 바라는 것은 모순이다. 

  나의 존재가치를 외부에서 찾는 일을 멈춘다. 분주한 일상에서 멈춰, 나와 이야기를 나눈다. ‘나도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 그렇지만, 너는 충분히 애써왔고,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야.’ 다시 나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어둡던 마음에 살포시 빛이 비친다.


      

작은 성공을 축하하며     

  날 사랑하기로 다짐하고 출근한 당일이었다. 한 남학생이 수업을 방해해서 꾸짖자, 내 말에 실실 웃었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뭐 잘못했나?’ ‘내가 만만해서 그러나?’며 자책했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난 잠깐 침묵한 후 말했다. “공부는 나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거야. 남에게 피해를 주면 왜 공부하니?” 이 말이 끝나자 신기하게도 그 남학생의 태도가 달라졌다. 다시 열심히 공책 정리를 하며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우와……, 되네!’ 

  내가 확신이 차 있고, 자신감이 있으면 같은 말이라도 더 힘있게 타인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느꼈다. 늘 거절감으로 인해 훈육이 유독 어려웠는데 작은 성공에 기뻤다. 늘 타인에게 주도권을 주었기에 흔들렸는데, 내가 안정되게 서 있으면 덜 흔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업과 삶은 참 긴밀하게 연결된 듯하다. 내 삶 속 고민이 수업에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 속 문제를 치열하고 고민하며 성숙해 갈 때, 수업 속에서도 교사로 조금씩 성숙해 감을 느낀다. 인생도, 수업도 어렵고 늘 부족한 것 같지만, 그런 내 모습을 인정하고 애씀을 스스로 격려해 주며 나아간다. 

  ‘어머, 예전에는 안 되던 것이 지금은 나아졌네.’ 이러한 성장의 기쁨은 어려움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지금 어려움이 많다는 것은, 성장의 가능성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겠지? 부적절하게만 느껴지던 내가, 오늘은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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