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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샘 Aug 17. 2024

진정한 배움을 찾아서

끊임없는 배움의 물결 속에서

끊임없는 배움의 물결 속에서     


  ‘AIDT가 뭐지? 새로운 교수학습모델인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것이 교육 트렌드인지라 ‘AIDT’도 새로운 교수법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AIDT(artificial intelligence digital textbook)는 ‘AI’와 ‘디지털교과서’를 합성한 말이었다. 교육부에서는 모든 교사가 올해 안에 AIDT 연수를 받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학교도 2학기에 AIDT 연수를 개설해 3팀으로 나누어 전 교원이 받기로 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좋아하지만, 뭔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무적으로 연수를 받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 의사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의무 연수이고, 게다가 시대에 뒤처질 수 없으니, 변화무쌍한 미래사회에 적응하려면 받아야지.

  배워야 하는 것은 AIDT뿐만이 아니었다. 1학기 때, ‘교실혁명 선도교사’를 모집한다기에 ‘교실혁명’이라는 용어가 다소 부담스러웠고 ‘선도’라는 단어도 불편했지만 뭐라도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신청했다. 그러나 한창 바쁜 6월, 업무에 찌들어 생활하던 나는 결국 복통으로 새벽에 응급실에 갔고, 교실혁명 연수는 수강신청시기를 놓쳐 강의를 들을 수 없었다. 호기심으로 신청한 연수였지만 연수 내용이 실제적으로 마음에 와닿지 않았고, 결국 내 의지가 없을 경우 흐지부지된다는 생각이 든다.

  2022 개정 교육과정으로 학교자율시간은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도 처음이라 막막하고, 요즘 한창 유행하는 IB에 ‘I’자도 모르는 나는 시대에 한참 뒤처지는 교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요즘은 새로운 것을 배울 에너지가 없다. 학교 일만으로도 너무 버겁다. 학교에서 수업과 업무에 시달리고 집에 오면, 저녁 먹을 힘도 없이 쓰러져 한 시간가량 누워있다. 그러다 겨우 힘을 내어 밥솥에 밥을 떠서 저녁을 꾸역꾸역 먹는다. 예전에는 저녁 시간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눈빛을 반짝이며 연구하고 공부했지만, 지금은 생존에도 급급하다.

  마치 기계 부품이 된 기분이다. 나의 의지라든지, 관심사, 신념, 꿈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거대하게 돌아가는 기계 속에서 열심히 쳇바퀴 위를 달려야 한다. 혹여나 그 속도를 못 따라가면 교체되거나 낙오되는 부품이 된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공부하고 연구해 온 것은 마치 아무런 효력이 없어진다. 늘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그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나 자신을 질책하면 어김없이 이 소리가 들린다.


  ‘난 부족해. (I’m not good enough.)’


    

잃어버린 주체성, 흐려지는 정체성   

  

  난 자기 주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주체성(agency)’를 강조하는 2022 개정 교육과정 시기에는 오히려 질질 끌려 마지못해 시대를 따라간다. 내가 어떤 교사인지, 내가 바라는 수업은 무엇인지 고민할 겨를도 없이 변화하는 시대의 속도에 맞춰 뛰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에 맞춰 디지털 역량을 키우는 것이 최우선이고, 디지털 교과서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이 소위 ‘미래 교육’이고 ‘교실 혁명’이다. 마치 거대한 공장에서 AI 활용 역량을 가진 교사를 찍어내는 듯 느껴진다. 교육의 주체가 교사라는데, 왠지 교육에서 소외당한 기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속에서 저항과 반발심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교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듯한 연수나 정책에 분노한다. ‘학교 현장이 이렇게 어려운데, 이런 고충에는 관심이 없고, 또 무엇을 배우라고 하는 거야?’라며 화를 내고 있다. 실제적, 법적으로 교사의 교육 권리를 보장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하향식(top-down)으로 무언가를 배우라고 하는 정책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낀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급격하게 변화하는 교육 환경 가운데 미래 사회에 필요한 학생들의 역량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하기 싫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소진될 대로 소진되었는데, 또다시 배움을 강요받다가 남아있던 배움을 향한 열정이 사그라질까 봐 두려운 것이다. 꾸역꾸역 달리던 쳇바퀴에서 내려온다. ‘다른 사람이 달린다고 무조건 달려야 하는 것은 아니야.’ 그럼 내가 진짜 원하는 배움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진정한 배움을 찾아서     


  배움에 지쳐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새롭게 배운 지식이 너무나도 빨리 휘발되어 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젊을 때에는 에너지가 있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역량을 키우는 데 힘썼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에너지와 체력의 한계를 느끼니, ‘이것을 배웠는데, 과연 얼마나 더 써먹을 수 있을까?’하며 계산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대가 지나고, 환경이 변해도 교육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변하지 않는 교육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건 인간과 인간이 만나, 서로 소통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학생도, 교사도 함께 성장하며 배움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존재에 관한 관심 없이, 삶에 대한 관심 없이 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교육은 결국 ‘나라는 존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그 시대의 예술적 기교를 익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 예술 세계에는 예술가의 정체성, 삶의 이야기, 신념,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 작품을 보며 감동을 받는다. 화가의 붓질이 기가 막힐 정도로 훌륭해 감동을 받기보다는, 그 작품이 주는 메시지 때문에 감동을 받는다. 어쩌면 우리는 교사로서 삶의 메시지를 찾아 나서는 것이 진정한 배움을 향한 발걸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 혼자서는 교사로서 내 존엄을 세우고 삶의 메시지를 찾기가 힘들다. 외부의 요구와 압박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생활지도가 힘든 학생, 부당한 민원, 쏟아지는 업무, 물밀 듯이 밀어닥치는 연수 속에서 소진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외부의 시선이 아닌, 교사의 시선으로 교육을 함께 바라보며 교사로서 삶의 의미를 찾아갈 동료가 필요하다.

  나에게는 수업코칭연구소 선생님들이 교사로서 살아갈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교사로서 역량을 키우기 위해 늘 외부로 시선을 돌리며 허덕이던 나에게, 존재 자체로 귀하다고 말해주며 수업 속 나의 신념과 철학을 찾는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수업을 통해 존재로서 만나며, 삶을 성찰하게 하는 수업 나눔을 통해 교사로서 내 수업의 색깔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렇기에 수업코칭연구소에서 배움의 과정은 내게 에너지 소진이 아닌 에너지 충전의 과정이다.

  더 나아가 수업코칭연구소에서는 내면성찰 과정에서 ‘나는 왜 가르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교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고,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더 깊이 있는 수업과 수업 나눔을 위해 자발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는 자칫 흐려지기 쉬운 교사의 정체성을 다시 찾아갈 수 있도록 돕고, 어떤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교사가 자신의 필요와 관심에 따라 주체적으로 실천적 지식을 함께 만들어가는데 의의가 있다.

  내가 바라는 진정한 배움을 생각해 보니, 소진되어 사라질 듯하던 교사로서의 내 모습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교사로서 나의 존엄을 지키며,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오늘도 교육의 본질을 붙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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