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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과봄사이 Nov 25. 2024

하교시간이 온다 (1)

두 달간의 비공식 돌봄 사건



공부해라
아냐 그건 너무 교과서야

조용하던 복도에 노랫소리가 퍼진다.

다들 업무에 집중할 시각인데 우리 교실에선

J의 노래가 시작됐다.

곡목은 '엄마가 딸에게'.

웅얼웅얼 가사는 알아듣기 힘들고 음정도 그럭저럭인데

안경을 쓰고 의자에 구부려 앉아 바닥 먼 곳을 응시하는 표정만은 정말 양희은이 봐도 인정할 수준이다.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에 출연했던 정은혜 작가처럼, J도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다.

등교할 때부터 방긋 웃음에 눈만 마주치면 손가락 하트를 날려댄다.

사람 좋아하고 후하다 못해 넘치는 애정은 옮겨다니기도 곧잘이다.

녀석이 작달막한 손가락으로 만드는 고 귀여운 하트에도 너무 연연하지 않기로 맘먹은 지 오래다.

요 조고맣고 귀여운 손하트는 못 참지


특수학교 아이들은 대부분 집과 학교가 멀어 학교버스로 등하교를 한다.

하교종이 치면 선생님의 손을 잡고 나가 저마다 세리머니를 날리며 버스에 오른다.

버스에서 내리는 곳은 제각각 다른데

내리는 곳마다 부모님이나 활동보조인 등 보호자가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J는 하교하지 못한 건 버스에서 내리는 지점에 J를 데리러 나올 사람이 없어져서다.

한 살 터울의 누나가 30분 남짓 버스를 타고 데리러 온다.

친구들이 모두 하교하고 1시간 넘게 지난 3시 30분이거나 때로는 4시를 훌쩍 지나기도 한다.

그리고도 콜택시가 오기까지 남매의 기다림이 이어진다.



J 어머니가 일을 시작하신 것이 그 발단이었다.

형과 누나 그리고 J까지 셋을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아온 어머니가 2학기의 시작과 함께

지인이 차린 가게일을 도와주게 된 것이다.

때맞춰 학교에는 저녁까지 돌보아 주는 늘봄교실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어머니가

늘봄교실 신청을 하지 않은 J는 대기 순위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두 달 넘게 복도에 J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누나가 오는 하교까지 남은 긴 시간 동안 J가 선택한 것은 전자칠판에 좋아하는 영상을 띄워놓고

노래나 뮤지컬을 흉내 내는 거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흥이 많은 데다 흉내 내는 데 능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매일 오후, 노랫소리가 교실을 채우고 빈 복도까지 흘러간다.



"얘는 왜 이 시간까지 남아 있어요?"

J를 본 선생님들은 모두 한 마디씩 한다.

이러다 내년에도 늦게 가는 거 아니냐.

그렇게 봐주면 내년 담임선생님에게도 기대한다.

J만 특별대우라고 다른 엄마들이 알면 뭐라 그러겠어.

무조건 데려가라고 해야지.

모두 맞는 말씀이다.

나는 왜 그런 말을 못 하는 걸까 생각도 해봤지만 끝내하지못하겠다.



없던 소음이, 그것도 하루이틀이 아닌 매일 이어지니 민원도 당연했다.

민원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문제는 담임인 내가 자리를 비울 때였다.

교실의 오후는 수업시간보다 바쁘다.

아이들이 하교하면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업무의 시작이니까.

회의나 연수 등 자리를 비우는 일이 생길 땐 데리고 갈 수도 없었다.

도서실에서 있었던 회의에 할 수 없이 J를 데리고 간 첫날,

무슨 일인지 묻는 질문과 그다음 쏟아지는 다양한 해결책들.

이 일에 대한 선생님들의 우려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J의 가방 속은 이전과 조금 달라졌다.

늘 바로바로 보내오던 가정통신문이 체크되지 않은 채 가방에 들어있기도 했고,

지난주 보낸 세수수건이 그대로 월요일에 돌아오기도 했다.



오랫동안 가정살림을 돌봐오던 엄마의 부재가 만들어 내는 소음들.

쌓인 빨래더미.

밥 먹을 자리 없는 식탁.

옷가지가 널브러진 소파.

선생님의 연락이 다시 와야 기억나는 아이들의 가방 속.

나에게도 익숙한 일상.

'집안 꼴이 이게 뭐람.'

‘그래 애가 셋에 그중 하나가 장애인데 일은 무슨 일이야.’

‘일은 무슨 일이야. 살림하고 아이만이라도 잘 키우자.’

불쑥불쑥 드는 생각들.

그 진통을, 온 가족이 겪어내는 중일 것이었다.





도움을 받기로 결심했다.

하교 후는 특별한 업무가 없다면 특수교육실무원과 사회복무요원의 공식적인 휴게시간인데.

그 시간에 없던 업무를 만들어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어렵게 꺼낸 이야기에 대한 사회복무요원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제가 볼게요. 휴게실에 있어도 딱히 더 편하지도 않아요."

당연히 쉬는 시간일 텐데도.

그렇게 J는 사회복무요원의 보살핌이라는 특별대우(?) 속에 누나가 올 때까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다운증후군 아이들은 대개 고집으로 유명하다.

이 고집은 좀 남달라서 마트에서 원하는 장난감 앞에 앉아서 두 다리를 내저으며 울어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J의 경우는 하교할 때가 되어도 버스를 타러 가지 않으려는 고집으로 나타났다.

우당탕 잘 뛰어다니다가도 하교 시간이 되면 바닥에 풀로 붙인 듯 딱 붙어 일어나지 않곤 했다.

일과 중이었으면 충분한 시간을 주었겠지만 학교버스는 마냥 기다려 줄 수 없다.

앉은 그대로 들어 올려 휠체어에 태워 이동한 적도, 네 사람이 동상처럼 뻣뻣한 J를 들어 올려

버스에 태운 적도 있다.

아마도 J는 학교버스가 떠나고 밤이 되어 모든 불이 다 꺼져도 그대로 앉아 있겠지.

이 때문에 우리 반에서는 하교시간 전에는 너무 재밌는 활동을 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시끌시끌 등하교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진다


그런 J였는데 누나와의 하교가 시작되면서 하교거부 현상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너무나 좋아하는 학교에서 일대일 관심 속에 충분한 시간을 보냈겠다, 사람 좋아하는 J는 누나든 엄마든 누군가 데리러 와 주는 것이 무척 기뻐 보였으니까.




누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교실 앞문에 나타나면 주섬주섬 가방을 멘다.

그다음은 사회복무요원이나 내가 정문까지 바래다주거나 엘리베이터를 타는 곳까지 배웅한다.


'선생님. J, 누나랑 방금 택시 타고 갔어요.'

정문에서 콜택시를 기다리는 남매를 지켜보고 있던 실무원님의 문자.

날씨가 너무 더울 땐 안에서 기다리게 하고 간식도 종종 챙겨주신다.

둘을 학교 현관에 두고 오는 게 맘에 걸렸는데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든든함.


(다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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