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끝나고 바로 준석이 생일 파티에 가기로 했는데 깜빡하고 선물을 두고 와서 다시 집에 갔다. 얼른 가지고 가려는데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내 방 창문 아래에 의자가 몇 개 놓여 있는데 거기서 아래층 할머니와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이름이 자꾸 들렸다. 그래서 무슨 얘기인가 하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은수 그냥 아빠한테 보내. 은수 고등학교 졸업하려면 십 년은 더 키워야 하는데 어떻게 키우려고.”
“내가 자식이 있니, 형제가 있니? 은수 아빠하고 나는 남이나 마찬가지지만, 은수는 진짜 내 손자 같아. 할머니 할머니 하면서 이쁜 짓 하는데, 내가 고것 때문에 산다.”
“은수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면 몰라도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 사서 고생을 하고 그래. 지금이야 이쁘지. 사춘기 오면 키우기 힘들어.”
“우리 은수는 진짜 착해. 1년 동안 속 한번을 안 썩였어.”
“아이고, 그새 은수랑 정이 흠뻑 들었네, 흠뻑 들었어.”
이게 무슨 말이지? 할머니가 자식이 없다고? 내가 진짜 손자 같다고? 그럼 아빠랑 나는... 뭐지?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준석이 생일 파티에 가야 하니 나중에 생각해야겠다. 그런데 선물을 들고 뛰어가면서도 자꾸만 할머니 말이 생각났다. 준석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피자를 먹을 때도 그랬다. 그래서 친구들이 더 놀자고 하는데도 빨리 집에 왔다.
할아버지가 안 계셔도 우리는 예전처럼 6시에 저녁을 먹는다. 할아버지, 할머니, 나, 셋이 먹던 밥상이 지금은 너무 크게 느껴진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밥 먹을 때 특히 더 그렇다.
“느이 할아버지 고등어에 묵은지 넣고 푹 지진 거 참 좋아하셨는데.”
“할머니 나도 좋아해요. 애들은 묵은지 이런 거 안 먹는데 나는 할아버지 닮아서 그런가?”
“그래 그래. 우리 은수 많이 먹어라.”
“할머니도 많이 드세요. 할머니, 오늘 준석이 생일 파티 갔는데 남자애들만 전부 다 왔어요. 어제 여자애들이랑 싸웠거든요. 그래서 여자애들은 아무도 안 왔어요.”
나는 할머니가 할아버지 생각하다가 울까 봐 틈만 나면 이것저것 이야기한다. 할머니는 예전처럼 크게 웃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를 보며 웃는다. 오늘은 더 많이 할머니 기분을 살피느라 밥도 잘 먹지 못했다.
‘할머니, 나 할머니 손자 맞지? 할머니 진짜 우리 할머니지?’
이렇게 할머니한테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수가 없다. 할머니가 아니라고 할까 봐 무섭다. 할머니는 틈만 나면 ‘우리 애기’ ‘내 새끼’ 그러는데 내가 할머니 손자가 아니라고? 말도 안 된다. 할머니가 나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그리고 시장 아줌마들이 할머니랑 나랑 똑 닮았다고 했다. 내가 진짜 손자가 아닐 리 없다. 아빠가 할머니랑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건 할아버지랑도 그랬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드라마가 할 시간이라 텔레비전을 켜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아! 아빠가 할머니를 한 번도 ‘엄마’라고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정말 그랬던 것 같다. 덜컥 겁이 났다. 할머니가 드라마를 볼 때 내 방에 들어가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지웠다 썼다 했다.
‘아빠, 나 은수야. 뭐 물어볼 게 있어서. 할머니가 아빠 엄마 맞지?’
아빠는 답장이 없었다. 만약에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가 아니면 나랑 같이 살 수 없는 걸까? 계속 그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나 보다. 할머니가 깨워서 지각한 줄 알고 벌떡 일어났는데 다행히 토요일이었다. 할머니는 아침밥을 차려주고 친구네 김장 도와주러 간다고 나가셨다. 아빠가 답장을 보냈는지 확인하는데 전화가 왔다.
“은수야, 어제 할머니가 아빠 엄마 맞냐고 왜 물어봤어?”
“그게… 아래층 할머니랑 우리 할머니랑 얘기하는 거 들었는데 좀 이상한 얘기를 해서.
할머니가 아빠 엄마 아니야?”
“…”
“아빠. 아빠?”
“응, 아빠 듣고 있어.”
“아빠, 나 할머니 손자 맞지?”
궁금한 게 많은데 아빠는 왜 이렇게 대답을 빨리 안 하는 걸까.
“할머니 손자 맞지.”
“그럼 왜 그런 얘기를 해? 피 한 방울 안 섞였다고. 그냥 아빠한테 보내라고 그러던데.”
“사실은… 아빠 낳아준 할머니는 돌아가셨어. 지금 할머니는 은수가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가 그때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사셨어.”
“그럼 진짜 우리 할머니는 아닌 거네?”
“그래도 은수 할머니긴 할머니지.”
“나 할머니랑 계속 같이 살아도 돼?”
아빠는 또 말이 없었다. 아빠 얼굴도 못 보고 전화로만 얘기하니 답답했다.
“아빠, 나 할머니랑 살면 안 돼?”
“할머니랑 살고 싶어? 아빠하고 사는 건 어때?”
“아빠하고 둘이서만?”
“응”
이번엔 내가 빨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빠가 기분 나쁠까?
“아빠하고 사는 것도 좋은데…”
“할머니랑 살고 싶어?”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