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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부부 May 15. 2022

도심 속 오아시스, 클라인가르텐

경향신문 토요판 '다른 삶' 2022년 5월 14일 연재

4월 중순의 부활절 연휴를 기점으로 베를린의 낮은 무척이나 길어지고 있다. 매년 실행을 하느니 마느니 많은 논란을 낳는 '서머타임'의 시작이 드디어 길고 긴 겨울을 지나 본격적인 봄의 시작을 알린다. 지난 몇 주동안 이어진 화창한 날씨는 더더욱 야외활동을 재촉한다. 그리고 매년 이 시기가 되면 약속이나 한 듯 마트들은 마치 계절과일처럼 '야외 그릴'과 관련된 제품들을 가득 진열한다. 먹거리, 야외용 가구, 캠핑 용품들과 심지어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장난감들까지, 마트에서 장을 보며 두리번거리다 보면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이 그릴을 할 만한 야외 공간을 가지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독주택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물론 문제가 없다. 햇살 가득한 잔디 위로 아이들이 뛰어놀고 한편에 마련된 그늘에서 먹을 준비를 하며, 마당 이곳저곳에 부지런히 심어놓은 제철 과일과 채소들을 열심히 즐기면 된다. 주기적으로 관리하고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니 그들의 진정한 홈그라운드다. 아마도 온갖 마트의 주된 고객층은 이 분들 이리라. 굳이 마당이나 정원이 아니어도 테라스나 발코니 등이 있어도 아주 적절하다. 반면, 거주공간의 일부가 아닌 야외 공간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바로 공공공원인데, 베를린시에서는 야외 그릴이 허용된 공원들이 제법 있다. 여름 해가 가장 길어지는 6월 중순부터 여름까지는 심심찮게 공원에서 여러 명이 그릴을 하며 어울리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심 속 녹색 오아시스인 작은 정원, '클라인 가르텐'이 있다.


독일어로 '클라인가르텐(Kleingarten)'이란 '작은 정원'을 뜻한다. 일정 규모의 대지를 균일한 규격으로 나누어 여러 명의 개인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일종의 '개인농장'이다. 한국의 주말농장과는 다르게 클라인가르텐은 도심 곳곳에 위치해 있어 해가 긴 여름 동안에는 퇴근 후 이곳에서 저녁을 즐기기도 한다. 꽤나 긴 역사를 자랑하는 개인 야외 정원을 뜻하는 이 개념은 독일 전체에 걸쳐 문화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베를린에만 2021년 1월 기준, 대략 66000개, 736개의 조합이 2900 헥타를 사용하고 있다니 그 합계 면적만으로도 큰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은 동네 산책 중 클라인가르텐을 처음 접하게 됐다. 처음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가 불분명한 그곳만의 묘한 분위기에 이곳이 뭐하는 곳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동네 산책로와 입구가 이어져 있어 어느새인가 정원들에 둘러싸이게 되는 진입방식도 독특하고, 식재된 식물들로 가려지는 곳이 있기는 하나 시각적 차단이 일어나지 않아 각 정원의 거의 모든 것을 산책로에서 볼 수 있는 것도 독특하다. 철조망 등으로 세대별 구획이 나누어져 있어 각 정원들의 색깔들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이걸 돌아보는 것이 또 하나의 산책의 묘미이다. 어떤 정원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많은 노력으로 가꾸어낸 멋진 솜씨들로 채워져 있기도 하고, 어떤 곳은 정말 재배만을 위한 곳도 있다.


적개는 열몇 세대부터 많게는 수백 세대가 하나의 조합으로 운영이 되는데, 꽤나 섬세한 규칙들이 있다고 한다. 각 세대는 오두막, 정원, 텃밭이 1/3씩 골고루 조성되어야 하고, 온실이나 연못, 어린이 놀이시설 등을 설치할 수는 있으나 땅을 파서 매입하는 형식은 금지되어 있다. 오두막은 세대에 따라 목재로 지어진 간이 건물의 형식도 있으나 사람이 살아도 무방할 정도의 제대로 된 집처럼 보이는 곳도 있다. 클라인가르텐 초기에는 정원을 가꾸고 잠시 휴식하는 용도로만 허용했기 때문에 집은 창고로만 썼다고 한다. 초반엔 자연스레 상하수도 시설과 화장실, 전기도 없었다고 한다. 요즘은 집 안에 부엌이나 화장실, 작은 거실을 만들 수 있고 전기도 들어온다고 한다. 그러니 사실, 집과 분리된 제대로 된 ‘정원식 생활’을 꾸밀 수 있다.


클라인가르텐의 진가는 코로나 초반에 빛났다. 모든 활동이 집 내부로 제한되었을 때, 야외활동에 대한 욕구를 어딘가로 분출하지 못해 그저 창밖만 바라보던 때, 우연히 접한 어느 유투버의 영상에서 봤다. 햇빛을 내리쬐며 한가로이 클라인가르텐에 앉아 '마스크 없이' 홀로 여유로운 모습을.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부러움과 결핍이 느껴졌다. '하아.. 좋겠다.' 그 전까진 클라인가르텐을 그저 하나의 '취미생활'로 인식했다. 시간 날 때마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얻을 수 있는, 자연과 가까워지는 시간에 대한 만족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야외활동에 대한 욕구가 출구를 찾지 못하며 일어나는 갈등들을 배경으로, 자연스레 클라인가르텐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2년 전 봄, 사람들은 산책에 대해서도 첨예하게 의견을 달리했었다. 심지어 스페인에서는 '동물'과 함께하는 산책을 허용하는 바람에 동물 모양의 풍선을 가지고 조롱하듯 산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누가 알았을까. 야외활동을 하는 것에 제한이 생기게 될 줄, 늘 하는 산책에 대해 다른 의견이 생기게 될 줄.


몇몇 직장 동료들은 코로나 초반에 베를린시 외곽,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로 이사하기도 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에서 서울을 감싸고 있는 경기도로 이동한 셈이다.) 하염없이 재택근무와 거리두기가 이어지는 탓도 있었지만, 이 기회에 아예 삶의 방식을 바꾼다며 대중교통도 잘 닿지 않는 외곽진 지역의 허름한 집을 고쳐 쓰는 이들이 있었다. 도심지 내에서는 일반 주택보다 건물의 0층(한국식으로 1층)에 위치해, 건물과 맞닿은 조그마한 외부공간을 함께 쓸 수 있는 가르텐보눙(Gartenwohnung, 정원을 뜻하는 가르텐(Garten)과 집을 뜻하는 보눙(Wohnung)의 합성어)에 대한 수요가 늘기도 했다. 이런 현상들을 시대를 특징하는 시간의 산물로 이해해야 할지, 재택근무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버린 새로운 삶의 형식에 대한 욕구로 이해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큰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공급 탓에 클라인가르텐을 임대받기 위한 대기 시간은 수년을 상회한다고 한다. 하긴 도시 개발에 대한 압력이 점점 강해져만 가는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지어지지 않은 땅에 무언가를 짓는 것이 쉽지, 무언가 이미 지어진 땅을 아무것도 없는 '정원'으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클라인가르텐 임대신청에 특별한 제한이 없는 탓에 누구나 신청은 할 수 있으나 언제 답변이 올진 모르는 모양새다. 물론, 대부분의 복지제도가 그렇듯 상세하게는 장애인, 연금수급자 등등에 대한 이점은 있다고 한다. 또한 임대 기간의 제한이 없는 탓에 임대가 시작되면 임차인이 스스로 계약을 포기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개인 매매나 양도를 할 수는 없지만 임차인이 노령으로 정원을 가꾸지 못하게 되면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니 누구라도 정원을 임대받으면, 그게 심지어 우리 가족이어도, 불가능한 상황이 되지 않는 한 놓지 않을 것 같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 아는 지인분의 클라인가르텐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분은 우리 집 말고 다른 가족분들도 초대를 하셔서, 세 가정의 4명의 아이가 정원에서 아주 야무지게 놀았다. 매번 겉으로만, 눈으로만 둘러보던 '오두막'에서 식사를 하며, 정원에서 아이들이 까르르까르르 뛰어노는 소리를 들으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초대해주신 가족분은 베를린의 다른 지역의 정원을 이용하시다가 재개발로 지금 현재 위치로 옮겨 오셨다고 한다. 정원을 임대하는 과정이 집을 임대하는 과정과 많이 흡사하다고 하신다. 최초 임대할 때의 정원과 밭, 오두막의 상태 등이 계약에 포함된다고 한다. 코로나 초반에 오두막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셨다는 고즈넉한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아이의 생일에 초대할 어린이집 친구들이 함께 놀 공간까지 생각하셨다는 꼼꼼함이 참 부러웠다. 다락처럼 생긴 공간은 참 아이들에겐 착 달라붙는 곳이다. 그곳에 엉켜 노는 애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짧은 시간 동안 들여다보니, 우리 가족만의 클라인가르텐을 향한 소망은 더욱더 커진다.


지난달 아이의 생일날이 생각난다. 막연하게 아이의 생일을 야외정원에서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루 종일 여러 명의 아이들이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야외 공간'. 그 공간 어딘가의 그늘에서 함께 앉아 떠드는 장면들을 상상한다. 텃밭 한편에 야외 그릴에 필요한 깻잎, 명이, 상추, 토마토 등등을 키우는 것도 필수다. 가끔 담벼락에 조그마한 바구니에 사과나 배 등을 넣어주고 '가져가셔도 됩니다'라는 세대들이 있다. 그분들처럼 스스로 소비하고 남은 열매를 나누는 것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곳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것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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