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토요판 '다른 삶' 2022년 11월 5일 연재
이제 진짜 가을이다. 낙엽이 거리를 뒤덮고, 날씨는 부쩍 쌀쌀해지고, 옷차림은 두터워지며, 해는 정말 짧아지고 낮아졌다. 베를린은 항상 겨울이 오기 전 낙엽을 ‘대청소’한다. 낙엽이 다 떨어질 때까지 그냥 뒀다가 겨울이 오기 전 한 번에 다 청소한다. 그래서 10월, 11월의 베를린의 길거리는, 비에 겹겹이 젖은 두툼한 낙엽들과 낮고 길게 드리워진 햇살이 독특한 가을 풍경을 연출한다. 각종 마트에는 수확의 계절을 알리는 계절 과일들이 많이 판매된다. 그중 낙엽 색깔을 유난히 닮은 여러 모양의 호박은 가을 분위기를 한껏 더해준다.
긴 여름 해를 도와주던 서머타임도 매년 종교개혁기념일인 10월 31일 즈음 끝난다. 한국에도 도입되려다 여러 가지 논란으로 철회되었던 서머타임은 아직 유럽에서 시행되고 있다. 유럽 각국에서도 그 실효성을 두고 여러 논란이 있지만, 여름과 겨울의 일조시간의 극적인 차이를 보면 어느 정도 필요성은 느낀다. 특히 밤 10시까지 환한 한여름의 긴 여름밤을 생각하면, 그리고 베를린보다 여름 해가 긴 지역을 생각하면 서머타임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냥 다만, 한국의 가족들과 통화시간이 매번 7시간 차이인지, 8시간 차이인지 헷갈릴 뿐이다.
길에 떨어진 낙엽을 보며 낭만적인 생각에 잠겨 보는 게 워낙 오랜만이라 그런지, 2022년 가을은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코로나 그 후, 온도가 떨어지면 다시 대유행한다는 공식에 전전긍긍하던 했던 때를 생각하면, 요즘의 가을의 참 고맙기까지 하다. 아직도 옆 옆자리의 직장동료들이 양성반응으로 집에서 근무해야 한다는 소식은 꾸준히 메일함을 돌아다닌다. 한때 ‘죽음의 공포‘까지 떠올렸던 시절에 비하면, 그래도 이건 양호하다. 이제는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며 동료들에게 머핀도 권하고, 맥주를 마시며 서로 어울리기도 하고, 축구를 단체로 관람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소풍과 같은 야외활동을 옹기종기 한다. 형광색 조끼를 하나씩 걸치고, 그 작은 손으로 옆의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선생님들과 재잘재잘 대며 대중교통에 오르기도 하고, 마냥 걸어가기도 한다. 소풍 때뿐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대중교통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 모습은 자주 보이는데, 아파트 단지까지 들어오는 샛노란 한국의 유치원 통학버스를 떠올리면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버스에, 지하철에 올망졸망 줄지어 다니는 꼬맹이들은 언제 봐도 웃음이 난다.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는 보호자의 가르침을 부끄럼으로 충실히 실천하는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아는 체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항상 앞선다.
아이들은 각자 싸간 도시락을 먹으며 동물원에 가기도 하고, 숲 속 어디 놀이터에 몰려가 한참을 놀기도 한다. 오며 가며 출근길에 마주치는 소풍길 꼬맹이들의 무리를 보고 있으면, 우리 꼬맹이도 저렇게 다니겠구나 싶다. 우리 아이는 한국에서 자란 엄마, 아빠와는 다른 유치원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아마도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며 그 차이는 더 커지지 않을까. 십 대를 이해하기도 벅찬데, 내가 자란 환경과 전혀 다른 환경과 시간을 사는 아이를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주변에 사춘기 아이들이 있는 한국 가정들이 가진 고민들이 문득 더 공감된다.
그간 유치원에 아이를 데려다주며 마스크를 쓰는 게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는데, 그게 없어지며 서로의 표정을 바라보니, 이것도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옷차림이 본격적으로 두터워지는 요즘, 마스크 없이 시원한 얼굴 표정이 도리어 따뜻함을 준다. 아이들의 표정은 물론, 다른 이들의 얼굴 표정을 보니,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들을 표정으로 나타낼 수 있으니 말이다. 저 꼬맹이가 저런 표정을 지었구나, 저 아이는 웃는 게 엄청 이쁘네 등등 우리 아이와 주변의 아이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도 중요하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마스크 뒤에 얼굴 표정을 읽는 건 매한가지 힘들었다. 복도에서 잠깐 마주치는 직장동료와 눈이 마주쳐도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매번 볼 때마다 눈인사를 하던 동료들 얼굴을 보며 ‘맞아, 저 표정이었지’라며 느낀다. 여러 명이 동시에 둘러앉아 마스크를 단체로 쓰고 회의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마스크가 없어도 알아듣기 힘든 독일말을 마스크까지 끼고 제스처까지 섞어가며 ‘가족오락관’을 찍었으니 웃지 못할 코미디였다. 그럴 바엔 차라리 화상회의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당장 옆에 없는 게 답답할까, 얼굴 표정을 읽지 못하는 게 더 답답할까 상상하곤 했다.
해가 짧아지고 평균온도가 내려가면서 자연스레 감기 환자도 많아진다. 여기저기 콜록콜록 기침 소리며, 훌쩍훌쩍 코가 막힌 소리며, 속이 뻥 뚫릴 정도록 시원할 정도의 코푸는 소리며. 어떤 모임이든 아파서 결석 또는 결근한다는 소식도 자주 접한다. 10월-11월은 일조량도 감소하고, 해가 길게 드러눕는 탓에 따스하게 낮 시간 동안 해를 쬘 수가 없어서가 아닐까. 강한 햇빛에 몇 시간 '일광욕'하듯 해를 쬐며, 기침이며 콧물, 오한 등의 감기 기운을 말끔하게 햇빛에 말려버리고 싶지만 화창한 여름 태양은 이제 내년에나 기약해야 한다. 생강이니, 레몬이니, 양파니 온갖 민간요법을 들이대며 감기를 이겨내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현행 제도상으로는 이제 '감기'와 '코로나'를 특별히 구분하지 않으니, 이게 어떤 바이러스인지 정체를 밝히는 것보다 그냥 뭐가 됐던 빨리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 코로나 관련 제재가 해제되면서 가장 먼저 축제들이 다시 생겨났다. 독일의 가을 행사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옥토버페스트이다. 세계 3대 축제 중 하나라는 이 맥주 축제는 원래 독일 남부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보통 9월 말에서 10월 초 2주 정도가 공식 기간으로, 도심지의 빈 광장이 순식간에 놀이동산, 그릴, 맥주가 가득한 거대한 텐트촌으로 변한다. 그러나 사실 이 축제기간 동안 내가 어느 장소에 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느샌가 일상 가까이에서 피부로 와닿기 마련이다. 독일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을 주말의 대중교통에서 마주치기도 하고, 독일 음식을 파는 식당들에서도 옥토버 페스트와 관련된 음식들과 음료들을 만날 수 있다. 생맥주로 알려진 장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마트에서도 ‘옥토버 페스트’ 에디션이라 명칭 되는, 평소 알코올 함량의 두배가 훌쩍 넘는 ‘축제용(?)’맥주를 판매한다. 그러니 그냥 ‘이 시기’ 자체가 축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축제의 규모가 크다 보니 이를 위한 준비도 철저하다. ‘인산인해’라는 사자성어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는 행사인만큼 방문객, 시, 그곳에서 영업을 하는 회사들 모두 긴장을 하고 대비를 한다. 지난 2016년 옥토버 페스트의 꽃이자 가장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바이에른 주의 뮌헨시는 이 축제를 위해 “경찰 인력의 투입은 물론 30억 정도의 별도 예산을 치안 유지를 위해 기부했다”는 기사도 있다.
현장의 모습들은 더욱 인상적이다. 단시간 많은 사람이 몰리기는 점을 감안해 그에 맞도록 거리의 간격과 텐트 사이의 간격은 널찍하게 떨어져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평소보다 높은 도수의 맥주를 리터 단위로 즐기다 보니 테이블 사이도 평소보다 더 널찍하게 여유를 두는 것이다. 서빙하시는 분들의 순발력과 조직력도 이 축제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기는데 일조한다. 건장한 체격의 경찰분들이 곳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술이 깰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이토록 큰 행사가 매년 같은 장소에서 일정하게 열릴 수 있는 것은 민간 기업과 관공서의 적절한 협업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이번 ‘이태원 참사’ 기사를 읽고 아쉬움이 컸다. 안타까운 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신 분들의 명복을 빌어본다.
긴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따스한 날씨를 즐기고픈 마음은 매 한 가지일 것이다. 조금은 차분하게, 일 년 전에 어딘가 넣어둔 멋진 코트로 멋을 내 봐야겠다. 낙엽이 지기 시작하면 황금빛 풍경을 배경 삼아 기억에 남을 사진도 남겨야겠다. 눈이 내리면 타려 했던 썰매도 괜스레 꺼내본다. 아이와 함께 까르르 눈이 하얗게 덮인 동네 언덕에서 뛰어놀 생각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