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토요판 '다른 삶' 2023년 03월 25일 연재
연말연시 이후 새해가 밝아오면 날씨가 따뜻해지는 봄, 더 정확히는 4월 ‘부활절 방학’이 시작되기까지 베를린에는 이렇다 할 공휴일이 없었다. 쉬는 날에 박한 베를린의 봄 달력에 ‘빨간 날짜’가 새겨진 건 4년 전, 그러니까 2019년 3월 8일이다.
1만5천 여 명의 여성들이 1908년 뉴욕시에서 평등과 권리신장을 위해 행진을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는 ‘세계 여성의 날’은 긴 역사를 가진다. ‘법정 공휴일’이기 전에도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계기로 지켜온 날임을 알고 있다.
특히 베를린에서의 ‘세계 여성의 날’은 조금 더 특별하다. 왜 ‘베를린’에 방점을 찍었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16개의 주로 이뤄진 독일은 각주마다 조금씩 다른 색깔들을 유지하고 있다. 법정공휴일도 그중 하나다. 남부의 어떤 도시는 문화의 오랜 축인 기독교와 관련된 날짜를 공휴일로 지정하고, 서쪽의 어떤 도시는 향토문화와 관련된 공휴일을 지내는 식이다.
베를린은 독일 주 정부 중 최초로 세계 여성의 날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올해부터는 메클렌부르크 포어포메른에서도 ‘세계 여성의 날’을 법정공휴일로 인정했다고 한다. 더이상 ‘유일한’이라는 수식어를 쓸 수 없지만 베를린에 사는 한 사람으로, ‘최초의’ 주라는 자부심은 여전하다.
앞서 2019년 법정공휴일 제정 당시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베를린의 1년 공휴일은 총 9일로, 독일의 평균에 머물렀다. 2023년 현재 바이에른 주의 아우크스부르크시가 14일의 공휴일을 지낸다는 것을 비교해 보면 그리 큰 숫자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베를린 의회에서는 새로운 법정공휴일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했고, 그 중 ‘세계 여성의 날’이 선택됐다. 마치 한국의 10만 원권에 적합한 인물에 대한 선택과도 비슷하게 ‘핫’한 이슈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여성의 날이었을까. 마틴 루터로 기억되는 ‘종교개혁기념일’은 독일의 9개 주에서 법정공휴일이지만 베를린에서는 아니다. 아마도 베를린의 다음 법정공휴일이 될지는 모르겠다. 여성들의 지위가 그만큼 높아서였을까. 아닐 것이다.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남편의 동의없이 은행 계좌도 개설하지 못했다던 나라가 아닌가.
마치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날은 ‘모두가 평등하게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다소 생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이들은 모두가 평등하게 일할 수 없다면 모두가 평등하게 일을 하지 않겠다는 역설의 평등을 주장했다.
지금은 은퇴한 독일의 전 총리, 앙겔라 메르켈로 대표되는 독일은 나에게는 ‘강인한 여성이 이끄는 강대국’이었다. 무려 16년 동안 4번을 연달아 집권한 여성이 이끄는 나라는 다를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환상이 깨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럽연합의 성별 임금 격차에 대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독일은 27개 유럽연합 국가 중 에스토니아, 오스트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성별 임금 격차가 큰 나라다. 유럽연합의 평균인 13%에 밑도는 18%라고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몇 해 전 독일에는 ‘여성 이사 의무 할당제’가 도입됐다. 이는 직원 수가 2천 명 이상인 동시에 3명 이상의 이사회를 둔 상장 기업에 적용되는 법안이다. 그러나 독일 법무부에 따르면 이 법안을 준수할 의무가 있는 독일 내 기업은 2021년 기준 70개이며, 그중 30개 기업의 이사회에는 여성이 없다.
아마도 이쯤되면 ‘세계 여성의 날’이 공휴일로 선정됐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나 역시 정치적, 사회적 배경에 깔려있는 의도를 알지는 못한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베를린 전반에 깔린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베를린 장벽, 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군의 분할통치를 받은 각기 다른 색깔의 지역들 등 베를린은 독일의 다른 지역과 다르게 유독 다양한 색채를 갖고 있다. 베를린의 동네를 구경하다 보면 어느 곳에서는 영국을, 또 어느 곳에서는 프랑스를 만난다. 심지어 구소련의 색채가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동네도 있다. 베를린의 다양성은 유치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유치원에서 만난 아이의 부모가 가진 다양한 삶의 배경이 이제는 그리 놀랍지도 않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이는 때때로 약자의 삶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여기에 급격한 문화적 차이를 다소 부드럽게 경험하게 하는 이곳 사람들 특유의 성향이 더해져 ‘여성의 날’이 자연스럽게 공휴일이 된 것은 아닐까.
독일에서 어학원을 다닐 때의 일이다. 직업을 소개하는 교재에 남성들은 파일럿, 의사 등이 주를 이루는 반면 여성들은 간호사, 주부 등으로 묘사된 것을 보고 50대의 베를린 토박이 남성 선생님은 “남성과 여성이 하는 일이 정해져 있지 않은 시대인데 이 페이지는 시대와 동떨어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렴풋이 처음 베를린에 살기 시작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여성의 날’ 즈음이면 평일에도 그 의미를 전하기 위한 행진, 행사가 잦았다. 당시에는 시내가 적잖이 복잡해지는 상황이 불편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곳의 일원으로, 딸을 둔 부모로 각별하게 ‘여성의 날’을 받아들이고 나니 사뭇 다르게 보인다.
베를린에서는 매년 브란덴부어크 문과 같은 시내 중심가 곳곳에서 여러 가지 문구를 담은 피켓을 들고 행진을 한다. 빵과 장미를 선물하며 일상에서의 축하도 이어진다. 빵은 저임금에 시달리던 여성들의 생존권을, 장미는 노동조합의 결성권과 참정권을 뜻한다. 일부 상점에서는 여성들에게 꽃을 무료로 선물하기도 한다. 그저 기념일이라면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밖에 모르던 과거가 송구스럽다. 생존권과 선거권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던 사람들의 고민에 비하니 초라하게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세계 여성의 날’이 법정공휴일이란 이야기는 ‘아직도 공휴일을 지정할 정도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문제를 이분법으로 나눠 바라보기 시작하면 싸움이 될 수밖에 없고, 나와 상관없는 문제라고 딱 잘라 말하면 그저 다른 세상 이야기로 남을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함께 고민하고 개선해 나가야 우리 모두의 문제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시작돼 유럽으로 건너온 ‘세계 여성의 날’의 중요한 주제는 투표권이었다고 한다. 불과 1세기 전의 일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특정 집단에 투표권이 없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홀로코스트를 통해 배운 독일 사람들은 과연 다를지, 그래서 더 기대된다. 이제 빵과 장미의 존재와 의미를 알았으니 실행에 옮길 차례다. 내년에는 ‘세계 여성의 날’이 왜 쉬는 날이냐고 묻는 아이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줄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