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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작정 떠나는 세계여행

프롤로그

by 부추

한 해 단위로 새로운 여행기를 쓰는 내 모습을 보니 불현듯 한 노래 구절이 생각났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어렸을 땐 각설이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다시 생각해 보니 각설이를 단순히 전국을 떠돌며 구걸하는 거지 떼들이라 부정적으로 바라볼 건 아닌 것 같다. 나름의 재능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고, 그 대가로 동냥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각설이는 사회를 구성하는 각양각색의 구성원 중 하나였을 뿐인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각설이에 대해 더 궁금해져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봤다. 각설이의 한문 뜻을 풀어쓰면 '깨달음을 전하는 말로써 이치를 알려준다'는 의미가 된다고 한다. 이 의미를 알고 나니 나를 함부로 각설이에 빗댈 수도 없을 것 같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가장 먼저 작년 동남아 4개국 여행기를 쓰다가 도중에 홀연히 사라져 버린 사람이 새로운 여행기를 다시 쓰게 된 이유를 설명해보려 한다. 작년 여행에서 처음엔 기록 목적으로 쓰기 시작했던 게 동남아 4개국 여행기였다. 몇 편을 쓰다 보니 더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하루에 서너 시간 정도를 들여 열심히 쓰게 됐다. 하지만 욕심이 너무 과했던지 그에 비례하여 부담도 커지고, 결과물도 실망스러워 글 쓰는데 점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아가게 됐다. 무더운 나라, 이동 동선도 긴 여행지에서의 피로까지 겹쳐서, 쓸 내용은 계속 쌓여가는데 글쓰기의 진도는 더뎌 그 격차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가 되어버렸다. 치앙마이에 도착해 조금 안정된 상태가 되면 쓰자, 세부에 가면 어차피 시간도 남아돌 테니 그때 몰아서 쓰자는 유혹에 못 이겨 미루고 미루다 결국 동남아 4개국 여행기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하지만 글쓰기의 고통과 피로에도 불구하고 다 쓴 뒤의 보람과 덩달아 높아지는 여행의 밀도는 너무나도 큰 장점이었다. 특히 그때 그 기억과 감정이 글을 쓸 때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경험. 그 매력을 잊지 못해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기도 다시 써보기로 했다.


이제는 이 여행의 계기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인 것 같다. 처음부터 ‘어느 여행지가 가보고 싶으니 가자’는 식으로 이 여행이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불현듯 내가 지내고 있는 환경이 이대로 계속되었다간 건강도 정신도 완전히 망가져버리겠다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내 인생에서 몸도 마음도 가장 건강했던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니 재작년 치앙마이 한 달 살기 때와 작년 동남아 여행이 떠올랐다. 하지만 돈도 시간도 많이 드는 장기 여행의 특성상 가고 싶다고 바로 떠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희망사항 정도의 수준으로만 생각하고 다른 방안들을 고민하며 며칠을 보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지금 살고 있는 월세방 계약이 5월 중순에 끝나는데, 떠나기로 결심만 한다면 방이고 뭐고 다 정리하고 한동안 돌아다닐 수 있는 것 아닌가? 경비는 보증금이랑 갖고 있는 돈으로 해결하면 될 테고.’ 솔깃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따져보니 그 희망사항을 현실화하는 과정에 극복해야 할 어려움들이 적지 않게 포진해 있었다. 생각만으로 그칠 것인지, 아니면 일단 출국 비행기 편부터 구매하고 나머지는 차차 처리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특히 결정을 망설이게 한 것은 문장 하나였는데, 그건 언젠가 출처도 모른 채 인터넷 어딘가에서 읽은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문구였다.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여행은 사실 여행이 아니라 도피가 아닐까? 가령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다 해도, 결국은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돌아온 이곳에 더 큰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과연 이 여행은 도피인가 생존인가. 무슨 일이든 제대로 된 명분이 필요한 법인데, 내게도 이 여행을 정당화시킬 확실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처음 이 여행을 생각하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도피라 하더라도 그냥 도피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도피이다. 결국은 생존이 우선순위이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여러 방법 하나로 이 여행을 택한 것이다.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 스스로는 납득을 했다. 생존도 생존이지만 어찌 됐든 이 여행을 하면서 잃는 것보다 얻는 게 커야 하니 열심히 보고, 듣고, 느끼고, 기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이 여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대략적인 기간은 5월 중순부터 내년 초까지이고, 언제 끝낼지는 다녀보면서 차차 정하면 될 문제이기에 이젠 어디를 다닐지, 즉 여행지를 결정해야 했다. 이전과 달리 처음부터 확실한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의 여행 스타일과 취향, 경비를 고려해 보았다. 수많은 변수가 발생하는 장기여행의 특성과 치밀한 계획 세우기를 귀찮아하는 내 성격상 대략적인 루트만 정해놓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계획하는 방향이 좋아 보였다.


일단 여행지로 제일 처음 떠오른 곳은 치앙마이였다. 2년 전 충동적으로 떠난 한 달 살기 장소. 한 달 살기로 유명한 곳이라서 선택했던 것이었는데, 실제 가보니 그곳의 평화롭고 자유로운 분위기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후 1년 뒤 또 방문했지만 두 번의 한 달 살기로도 만족이 되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론 1년 동안 치앙마이에서 지내다 오고 싶은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기록하자는 그 다짐에 어긋나기 때문에 가더라도 다른 곳들을 둘러보고 마지막에 몇 개월 지내고 오는 것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치앙마이 외에 다른 여행지를 생각하다 보니 작년에 계획은 했지만 가지 못했던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인도가 떠올랐다. 넉넉지 못한 여행 경비상 물가가 비싼 유럽은 부담스러운 곳이기에, 아직 가보지 못한 아시아 국가들 중 비교적 물가가 저렴하고 여행지로 접근성이 괜찮은 곳들이 이 세 국가들이다. 특히 인도는 20대 초반부터 미지와 신비의 여행지, 여행자에게 깨달음을 주는 여행지로 내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꼭 경험해 보자는 결심을 했다. 동선상 인도네시아에서 여행을 시작해 위로 올라가면서 인도까지 둘러본 후, 여유가 되면 스리랑카나 네팔까지 방문하고 익숙한 베트남과 태국에서 여행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큰 줄기를 잡았다. 대략 일정과 장소가 정해졌으니 첫 여행지인 인도네시아행 비행기 편을 검색했다. 가장 항공료가 저렴한 도시는 의외로 발리였다. 몇 년 전에 검색해 봤을 땐 왕복 6-70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위탁수하물 포함 20만 원이 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일단 발리를 최우선 순위로 정해 놓고 나머지 준비는 남은 한 달 동안 차차 하기로 했다.


이번엔 앞서 여행기에서 했었던 끝까지 써보겠다는 다짐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 매일의 여행을 쓸 자신도 없다. 하지만 각설이 정신으로 마음껏 떠돌아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힘껏 담아내다 보면 여행도 여행기도 의미 있게 마무리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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