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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킷랩 Mar 18. 2019

이해가 안되야 자유롭다

느낌의 미술관, 조경진





1.
안녕하세요, 버킷랩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조경진’ 의 ‘느낌의 미술관’’ 입니다.

2.
책은 2018년 11월에 나온 비교적 신간인데요. 최근에 TV나 책 등을 통해 예술작품을 만날 때마다 ‘그림은 알고보면 더 좋다’라는 말이 떠올라서 함께 읽는 도서로 선정해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이 책은 총 14가지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타인은 볼 수 없는 작가만의 느낌을 구현해낸 것이니만큼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예술을 이해하는 방법론을 서술하는 것 역시 평소 익숙한 우리의 생각 방식을 깨버리기를 요구하는 부분들이 있어서 읽는 동안 꽤 힘들었던 책입니다.

함께 읽은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을지 상당히 궁금한데요! 저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이해하지 못하는대로 넘어가고, 내게 와닿는 부분들로 축소된 의미들도 즐기는 편이라 나름의 견해로 제가 이해한 예술을 즐기는데에 가장 중요한 태도인 ‘표상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3.
앞에 보이시는 그림은 약 3만2천년전에 그려진 프랑스 쇼베동굴 벽화입니다. 동물들이 무리를 지어 어딘가로 이동하는 듯 하네요. 동굴 속 인류들은 이 동물들이 달려가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이 그림을 그리게 됐을까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그림을 그려야하는 동물의 수가 아주 많다면 어떨까요? 아주 오래된 시기에서 조금 시간이 흘러서 가축을 키울 수 있는 시기라면 자신의 종족이 가축을 몇마리 키우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수많은 가축을 다 그릴 수는 없으니 이제는 하나의 가축을 하나의 작대기로 대체하기 시작합니다.

쇼베동굴 벽화에서 하나의 말그림이 한 마리의 말을 가르킨다면, 이집트 벽에 적힌 숫자기호는 하나의 작대기가 한 마리의 말일수도 있지만, 하나의 사과일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한명의 사람일수도, 한 개의 농기구 일 수도 있죠.

대상을 그 자체로 재현한 그림이 그 대상과 일대일로 대응된다면, 기호는 특정할 수 없는 대상과 일대다로 대응합니다. 대상을 재현한 일대일의 그림은 표상적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대상의 재현이 아닌 사용자의 의도가 반영된 기호는 해독이 필요합니다. ‘앞선 문장들을 보았을 때 여기에서 쓰인 이 한 획은 사과겠구나!’ 하는 문법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4.
예술은, 특히 미술은 점점 더 그 작품 속의 문법이 개인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표상의 한 방식인 재현의 수준으로는 말 하지 못하는 작가만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작가와 그림만의 의미부여가 필요해지기 때문인데요.

하나의 말 그림이 한 마리의 말을 의미하던 쇼베 벽화에서 조금 더 많은 기호를 갖게 된 16세기의 바니타스 그림을 한번 살펴볼까요. 이 그림에서

책은 배움과 지식의 한계, 악기는 세상의 즐거움이 지닌 무상함, 불 꺼진 램프와 시계는 생명의 유한함, 깨지기 쉬운 도기는 인간의 연약함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 해골은 인간이 절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나타내며 허무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5.
이번에는 조금 더 현대에 그려진 그림을 한번 살펴볼까요. 제가 좋아하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가져와봤습니다. 몇 가지 색이 캔버스에 칠해져있습니다. 별다른 무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수평으로 그어져있네요. 아주 단순합니다.


로스코가 굳이 이 색깔들을 고른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우리가 편리하게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그러니까 빨강색은 정열이나 경고라던지 파랑색은 우울을 의미한다는 그런 식의 이해로는 해석할 수 없어보입니다.

모니터로는 전달되지 않는 그림의 크기에도 역시 작가의 암호가 있을 것입니다. 이 그림은 왜 세로로는 2미터, 가로로는 1미터60센치미터가 넘을 만큼 커야만 했을까? 그는 왜 그 큰 면을 색으로 채워야했을까요?

앞서 보았던 쇼베동굴 벽화나 바니타스와는 차원이 다른 암호난이도를 보여주고 있네요.

6.
그렇다면 우리는 해석이 거의 불가능해져버린 예술을 해독하는 것을 의미없는 일로 여겨야할까요? 그럴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상호간의 불가해성이 예술이 관람자를 자유롭게 만드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표상적인 사고방식은 세상을 살아가는데에 매우 효율적입니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고, 그 납득을 타인들과 공유하고 있으니 서로가 사용하는 기호와 문법이 동일하고, 이해가 용이하고 편합니다.

그러나 예술은 의도적으로 그러한 방식을 배제하려 노력하고 자기만의 기호와 문법으로 작품을 써내려갑니다. 혼자만 알고 있는 이 기호와 문법은 타인들이 추측하기 어렵고, 소통이 잘 안되고, 불편하지만 우리는 그런 예술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평소 익숙했던 편리하고 효율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내가 가보지 못했던 생각과 의미의 영역에 도전해볼 수 있게되는 것이죠.

7.
어려운 내용이다보니 나름의 정리가 머리를 더 어지럽게 만든 것 같기도 한데요. 그래도 최소한 ‘무언가를 표상적으로 완전히 이해하려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던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의도를 완벽히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작품과 관람자인 내가 독립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가 선명하고, 내가 평소에 생각해보지 못한 어떤 영역으로 날 데려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삶에서 예술을 가까이 해야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책, ‘조경진’의 ‘느낌의 미술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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