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맛이 없다고 할 자유
여행을 가면 현지 음식을 여러 가지 먹어보는 편이다.
같은 음식도 누구에게는 별미이고, 누구에게는 거부감이 든다.
터키에서 먹은 길거리 음식, 되네르 케밥.
갓 구운 빵 사이에 양곱창을 얇게 썰어 넣은 음식이다.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할 정도로 맛있었는데, “누린냄새 난다”며 먹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너무 기름지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다.
스페인에서 먹은 빠에야도 비슷했다.
나에게는 깊은 풍미였지만, 같이 간 친구들은 “비리다”, “짜다”라고 한 음식이었다.
음식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같은 '사건'을 두고도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인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게 신대륙은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침범’이었다.
그래서 '콜럼버스의 날'은 조 바이든 행정부 이후 '원주민의 날'로 명명되기 시작했다.
영화 아포칼립토는 내가 우연히 TV를 틀었다가 끝까지 본 영화이다. 주인공은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까지 도망치지만, 결국 다시 잡힐 상황에 놓인다. 그런데 그 순간, 모두가 일제히 싸움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본다. 그들의 노력을 비웃듯 웃음을 띈 낯선 배 한 척이 해안에 도착한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파멸의 시작이다.
우리나라와 일본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한 나라에서는 독립을 위한 투쟁이 다른 나라에서는 테러로 불리기도 한다. 같은 행위가 누구에게는 영웅의 이야기이고, 누구에게는 범죄의 기록이 된다. 실제 영웅을 기리는 행위가 다른 국가에서는 불매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범죄는 과연 무엇인가. 법은 정의의 기록인가 승자의 기록인가?
예전에 이런 고민을 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은 공무원이 내부 CCTV 영상을 인권위에 제출했다는 이유로 업무상 비밀누설 및 개인정보 침해 혐의로 송치된 사건이었다.
기록만 보면 구조는 단순했다. 공무원이 공공기관 내부 자료를 외부로 반출했고, 그 안에는 개인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포함되어 있다.
구성요건 해당성은 명확했다. 명백한 범죄행위.
제출된 CD를 하드디스크에 넣고 돌려보았다.
'엥? 이게 뭐야'
영상에는 장애인 여성이 성추행을 당하는 장면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순간 나는 ‘정보를 유출한 사건’이 아닌,
‘왜 그 정보가 유출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피의자를 불러 조사했다.
20년 넘게 근무한 공무원이었고, 진술은 담담했다.
다만 조사 도중 몇 차례 말을 멈추다가 결국 억울함에 눈물을 보였다.
청소하는 장애인 여성이 수차례 직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조직 내부에서는 사건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으려는 분위기였어요... 저도 괜히 그 흐름을 거스르려다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무서웠고요"
그러나, 딸을 가진 그는 그냥 두고 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용기를 내 상급자에게 정식으로 감사를 해야 한다고 문제 제기한 이후에는
단체 대화방에서 제외되거나 “야, oo 지나간다. 다들 조심해 ㅋㅋㅋ" 수군거리는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유사한 정황은 기록에서도 확인되었다.
추가로 살펴보니 사건 당시 시점은 선거를 앞둔 때였고, 조직 내부에서는 구청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사안을 확대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는 결국 내부에서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인권위에 자료를 제출했고, 그 결과 돌아온 것은 인사상 불이익과 형사 고발이었다.
피해자의 입장을 직접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피해자는 장애가 있는 상태였고, 적극적인 의견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가 한 일은 분명 문제 될 여지가 있었다. 조직의 측면에서 보면 쉽게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함께 보아야 했다.
그가 드러내려 한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침묵 속에 지워질 뻔한 약자들의 미래였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 사실을 외부에 알리기 어려웠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수단 또한 정당했다고 보았다. 결국 공익 실현이라는 정당한 목적 아래, 그에게 혐의 없음 처분을 내렸다.
콜럼버스에게 신대륙은 ‘발견’이었지만, 원주민에게 그것은 ‘침입’이었다.
한 공무원에게 CCTV 공개는 ‘범죄’였지만, 피해자에게 그것은 ‘구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발견은 누구의 언어인가? 그리고 범죄는 누구의 시선인가?
우리는 행위가 아닌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너를 보고 있다고 해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낯선 음식에 대해 우리는 쉽게 “틀렸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라고 말할 뿐이다.
누구나 맛있다고 해도 두쫀쿠를 싫어하는 입맛을 비난하진 않는다.
그런데 타인의 행동에 대해선 훨씬 더 쉽게 “틀렸다”라고 단정한다.
나는 왜 기어코 미워하는 너를 틀렸다고 말해야 안심이 될까
내 입맛도, 음식도 잘못된건 없다.
너는 그저 내게 맛이 없는 음식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