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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Nov 17. 2022

11년 전 내가 쓴 편지가 나에게 돌아왔다.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


편지와 엽서 쓰기를 즐겨했다. 좋아했다.


상대방을 떠올리며 그에 걸맞은 종이를 고르는 그 순간부터 글을 쓸 때 마음에 집중하는 자세를 취할 때, 내 주변을 에워싸는 공기가 좋았다.


생일은 생일이어서, 기분이 꿀꿀하면 꿀꿀한 대로 편지가 쓰고 싶어지는 글감의 소재가 되었고, 여행을 가면 다른 건 몰라도, 아무리 시간이 촉박해도 그 나라의 엽서와 우표를 즉석으로 구매해 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 부쳐야 직성이 풀렸을 정도이다. 이걸 빼먹으면 여행 중 일부는 실패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얼마 전에 친구 M이 방 정리를 하다가 내 편지들을 발견했다며 반가웠는지 하나둘씩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내가 이런 내용을?' 하며 재미나게 보다가,  편지만큼은 새삼  의식을 깨운 내용이라 옮겨 적어본다.





   







M에게,


"생일 축하한다."

이 편지를 볼 때쯤이면 날이 좀 지나있을 테지만..



M아, 난 말이야. 너랑 만큼은 말한 대로 지키고 행동하고 함께 하는 그런 절대적인 친구 사이가 되고 싶다.


근데, '절대'란 말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인간인 우리에겐... 그렇지?

허나, 노력은 기울일 수 있겠지. 그게 쌓여서 현실이 되고 말이야. 안 그래?



작년에 나 조교 할 때, 너랑 네이트에서 했던 말들... 꿈...

둘이 어디든 (오지이든 신세계이든) 가서 행해 보자고! 했던 말들...

꼭, 잠시, 언제라도 실현시켰으면 좋겠다.

나의 소중한 친구 너와 함. 께.



나의 불안정한 것들에 익숙해지고, 단련이 되고, 지쳐도 보고, 이기고, 피하기도 해 보고, 부딪혀도 보고...

한동안 버거웠는데 요즘 한결 가벼워졌어.



좋아해야 하는 걸까? 의심해야 하는 걸까?



요즘 하나님께 자주 말하고 있어. 감히 뜻을 완벽히 알려고 하기보다는 믿고 의지함으로 지금 이 순간을 걸어가 보겠다고 말이야.

지름길이 아닌, 또 억지로 가는 험난한 길도 아닌, 지금 내가 있는 주어진 상황에서의 길을... 말이야.



좀 더 단단해지자.

좀 더 지혜로워지자.

좀 더 열심히 해보자.

살아보자. 진지하게. 더 낮아져도 보자.



언제쯤 발악하지 않고 무리하지 않은 채, 지금 모습 그대로의 모양대로 선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욕심도 추악함도 없는,

꼭 그럴 필욘 없다면서도

그러해지고 싶다.



승리하자. 사랑한다. 친구,



11년 전, M에게 쓴 편지 -









생일 축하한다. 이 한 마디를 빼놓고는 가벼운(산뜻한) 축하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다. 아니, 심히 비장하다.

(생일 축하 편지라 아니라 전쟁터에 나가는 어떤 이에게 보내는 글이라 해도 믿겠다)

20대 중반, 대학을 갓 졸업한 처자는 인생 다 살아본 이의 말투로 친구의 생일 축하를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걸까.

(친구들은 내 편지를 받으면 "네 글은 오그라들어~~" 하면서 내 편지 받는 것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부터 난 애늙은이로 유명했다.


나에게 고백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철이 덜 든(?) 듯한 부류의 이들이었고(그자들은 내게 그들이 갖고 있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직관적으로 감지했었나 보다), 오빠들도 내게 누나 같다며 내 앞에서 본인들과 동급인 이와 논할 수 있는 질펀한 인생을 자주 안주 삼아 꺼내 토로하곤 했었다.


또 여자 친구들에겐 걸크러쉬의 이미지가 있었던 거 같다. 언니처럼, 엄마처럼, 친구처럼.. '구해줘요, 119!' 같은 언제든 기댈 수 있는 그런 존재.


애늙은이는 오지라퍼가 되기 딱 좋은 요건들을 갖추고 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의 온갖 고민 상담이 곧 나의 생각거리가 되고, 그런 일들에 자주 노출되고 뛰어들다 보니 남의 일을 내 일처럼 공감하는 것에 어느덧 전문가 수준의 태도와 자세를 갖춘 세상 속 내가 자라나고 있었다.


일례로 고등학교 때, 한 절친은 내게 병적인 수준으로 의존을 해서 내가 잠시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는 순간이면 그 짧은 10분이라는 쉬는 시간 동안 층과 층을 오고 가며 'K가 어디 있냐며, 안 보인다고..' 1반부터 12반까지 날 찾아다녔던 일화는 지금까지도 가끔 회자가 된다.


또 다른 예로 5명의 무리의 친구들이 나와 한 그룹이라면 난 그 사이에 늘 중재 역할을 도맡아 했었다. 그러려고 그런 이가 된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지나 보면 그렇게 되어 있었다. 한창 예민한 고등학교 소녀들. 얼마나 할 말이 많았겠는가. 1,2,3,4의 각 친구들이 내게 한 번씩만 서로의 이야기를 토로하다 보면 나에겐 네 가지의 이야기가 생긴다. (물론 나만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흡수했던 것은 아니다. 나 또한 함께 토로하고 나누었다)


그 네 명의 친구들이 각자가 다른 이에게 품고 있던 불만이나, 속마음 등을 나에게 고백하고 나면 난 적당히 수습(무마) 하거나 비밀을 지키기에 앞장서는 입장이 되어 인간관계에 대한 현명한 대처법 같은 것을 글이나 가르침으로 배운 것이 아닌, 자연적으로 습득하게 되는 한층 더 노련한 애어른이 되어만 갔다.


딴엔 어린 나이에도 내가 애어른 취급받는다는 것을 알고, 더 어른인 척을 했던 것 같다.


물론 성향상 내재된 어른이 내게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나도 아이랍니다~'라고 하고 싶은데, 그렇게 돌아가기엔 어느덧 너무 멀리 와버린 세상 멋진 원더우먼이 내 얼굴에 가면을 붙이고 도망간 것일지도 모르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교회에선 청년부 회장, 학생부 교사, 학교에선 신우회 회장, 찬양 리더, 어딘가엘 뜨면 앞장서서 무언가를 무의식적으로 행했던 나이다.

가끔은 나도 뒤를 따라가 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발자국을 그냥 따라 밟고 지나가는 그런 이가..


나. 도. 가. 끔. 기. 대. 고. 싶. 다.라는 마음을 무의식에 품기도 했다.


뭐라 항변할 말이 없는 게, 그 누구도 내게 기대지 말라 강요한 적이 없다.

주체적인 삶을 갈망했던 건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그렇기에 이건 어찌 보면 내가 만들어놓은 내 세상인지도 모른다.

내가 구축해놓은 세상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가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 될, 이젠 어떻게 되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을 정도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인. 그런. 나.

내 몸 어느 한구석에 그런 내 행동과 마음을 자아내게 하는 세포가 존재하는 것만 같다.




11년 전의 내 편지를 보니, 그렇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최근에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되고 싶다'라는 마음을 품은 적이 있다.

무언가 해야만 하는, 또 무언가가 되어야만 하는, 또 아니어도 된다, 이런저런 다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그냥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어도 되는 나'에 대해 탐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그런 순간에 (있는지도 몰랐던) 저 흰 종이 편지가 신비로운 타이밍에 내게로 찾아왔다.


11년 전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다시 만나, '나 이만큼 달라졌어'라고 발견할 만한 내적 특성이 하나도 없다는 게 놀랍다.

아이러니하게도 ‘변화 없음’이 내게 지금 내면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이상하리만치 묘하게 위로가 된다.


'네가 생각한 대로 잘 해왔어......'라는 말이 편지 뒤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 같았다.




내 일기를 들춰보는 것과 남에게 보낸 내 마음을 다시금 들여다보는 것. 상당히 흥미로운 상황이다.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를 나 또한 차곡차곡 모아두었기에 한국의 집에 가면 (자산가가 된 것 마냥) 크게 세 박스 정도에 종이 보물들이 숨겨져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내 친구들도 나와 같은 습관과 감성을 지니고 있다면) 내가 보낸 편지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해 옛날의 내 기록을 모아 하나로 묶어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한다.



기록의 힘은 (늘 강조하지만) 진실로 위대하다.


11년 전의 내가, 11년 후의 나에게 참다운 기운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지난한 한 주를 겪어냈다.

겪어냈다고 그것을 이긴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온몸으로 받아냈고, ‘나는 다시 나아간다’라는 이야기. 그걸 적어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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