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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Sep 01. 2022

커피를 내려 마시는 아침

이 매거진의 태그를 '요리 에세이'라고 붙여 봤지만 실상 내가 가장 못하는 것이 요리다. 얼마 전에도 할머니가 보내주신 양파로 장아찌를 만들어보겠다며 덤비다가 손가락 끝이 뭉텅 썰려서 3 바늘을 꿰맸다. 실밥을 풀기까지 2주 간 삶에서 손가락 끝이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하는지 절절히 깨달았다. 손가락이 없으면 스킨로션을 바르지 못합니다. 그리고 손가락에 얼마나 많은 물이 시도 때도 없이 묻는지 깨달았다. 컵에 물을 따를 뿐인데도 촉촉이 젖어가는 갓 간 붕대를 보는 참담한 심정이란.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든다. 장아찌를 담그는 게 '요리'라고 할 수 있나? 네이버 어학사전에 검색해봤다.


요리 5 (料理)

[명사]
1. 여러 조리 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듦. 또는 그 음식. 주로 가열한 것을 이른다.
2. 어떤 대상을 능숙하게 처리함을 속되게 이르는 말.


장아찌는 가열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양파를 까고, 세척하고, 썰고, 통에 담고, 간장을 붓는 여러 조리 과정을 거쳤으니 요리라고 부를 수 있겠다. 2번의 의미까지 합쳐서 보자면 나는 양파를 요리한 동시에 요리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요리를 정말 정말 정말 못한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거다. 자취를 오래 했지만 내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해먹은 경우는 손에 꼽기 때문이다. 요리를 하는 건 특별한 일이라 그럴 때마다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니, 지인들은 내가 요리 해먹은 사진만 보고 음식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본의 아니게 속이게 되었지만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요알못(요리를 1도 알지 못하는) 내가 감히 요리 에세이를?! 싶지만, 못해서 쓰는 거다. 낯설고 어색한 요리와 친해지고 싶어서. 요리를 할 수 있다면 삶에 즐거움이 큰 폭으로 확대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한 건 팀장님인데, 평소에도 쾌활하고 다정한 그분이 무척 좋다. 손가락이 썰린 이야기를 하니 본인도 무수히 많이 그랬다고 한다. 무서워 더 이상 요리는 안 하고 싶다고 하니, 그래도 스스로 요리해 먹는 즐거움은 어떤 것과 비견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해봐야지.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요리도 아장아장 걸음마하듯 하나씩 해내면 언젠간 되겠지.


나는 사진 찍는 것보단 글 쓰는 것을 좋아하니 요리 일지를 기록하기에 글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내가 할 요리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는 데, 이해하면 포용할 수 있다고. 내 한미한 요리 세계도 쓰다 보면 품에 한가득 그러안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오늘의 요리는 '커피'다. 커피가 요린가? 요리는 주로 가열한 것, 여러 조리 과정을 거치는 것. 그러니 커피는 내게 요리다. 



커피 만드는 법

준비물: 원두, 커피머신

조리 단계

1. 곱게 갈린 원두를 포터 필터에 담는다.

2. 포터 필터 주변을 깔끔히 정리하고 템퍼로 평평하게 눌러준다.

3. 커피머신에 꽂아 원하는 양만큼 추출해주면, 끝! (보통 1샷에 30cc)


직장인들의 생명수라 불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지만 재택근무를 할 땐 생명수보단 여유에 가깝다. 아침마다 노트북에 앉기 전 한 잔의 커피를 내리는 동안 은은히 퍼지는 원두 향기는 평온 그 자체다. 이 커피 한 잔과 함께라면 어떤 업무도 쳐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충전된달까? 얼죽아는 아니어서 비 오는 서늘한 날엔 따뜻하게, 햇살이 내리쬐는 날엔 차갑게 마신다. 오늘은 블라인드 없으면 살이 익을 정도로 햇살이 내리쬐어 차갑게 한 잔 내려봤다.


커피머신 사용법은 간단하다. 포터 필터에 알맞은 양의 원두를 넣고, 알맞은 압력으로 템퍼로 누른 다음, 머신에 꽂아 샷을 추출한다. 그런데 이 '알맞은'을 맞추려면 어느 정도 숙련도가 쌓여야 한다. 


처음 커피머신 사용법을 배웠던 건 21살의 가을이었다. 학교 앞의 프랜차이즈 커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보통 커피점의 머신은 고성능이라 아무리 똥 손 이어도 얼추 흉내를 내면 훌륭한 샷을 내릴 수 있다. 그 가게의 머신은 자동이라 원두를 채워 넣으면 알맞은 양의 원두를 포터 필터에 담아준다. (지금 사용하는 커피머신은 반자동이라 갈려진 원두를 직접 포터 필터에 담아야 한다.) 그리고 템퍼로 원두가루를 누르는데, 너무 강하게 누르면 뻑뻑해져서 물이 가루 사이를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추출이 잘 안 되거나 느려지고, 샷의 색감도 매우 진해진다. 반대로 부족하게 누르면 물이 쉽게 통과하여 색이 옅어지고 거품이 큰 맹탕 같은 샷이 추출된다. 그렇다고 템핑 하는 것이 엄청나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가볍게 '꾹-' 정도 느낌으로 하면 된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일했던 커피점은 영화관이 있는 건물의 1층이었다. 상영 시간을 촉박하게 앞두고 급히 커피를 가져가는 손님들이 많았다. 덕분에 영화를 보는 주말 저녁이면 엄청나게 바빴다. 정신을 바짝 차려도 주문이 바뀌거나 누락되거나 재료가 떨어지는 순간이 꼭 한 번은 나왔다. 그날은 중년의 손님이 찾아왔다. 가을에 어울리는 버버리 스카프를 두르고 우아하게 볼륨이 들어간 단발머리였다. 내가 일했던 곳은 부산이었는데, 그는 부산 사투리도 거의 쓰지 않았다. 


"녹차라테 따뜻하게 하나 주세요. 영화가 곧 시작이라."


'영화가 곧 시작이라' 이 말은 영화관 건물 1층 커피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겐 암묵적인 명령어다. 입력 즉시 신속하고 빠르고 정확하게 음료를 생산해야 한다. 임무 실패 시 손님의 우락부락한 분노를 받아내야 한다. 아직 일이 익숙하지 않던 나는 녹차라테를 빠르게 만들긴 했지만 정확하진 않았다. 음료를 받아간 손님은 이내 돌아와 녹차라테가 너무 옅으니 한 번 마셔보라고 했다. 처음 받은 클레임에 당황한 나머지 손님의 녹차라테를 커피스틱으로 쪽, 마셔봤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헉, 옅은가?' 싶어서 확인해 보려는 의도였지 않을까. 맛보는 방법에는 작은 스푼이나 컵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혹은 맛보기 전에 새로 음료를 만들어드리거나. 그 당시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나 보다. 


"가루 좀 더 태워드릴까요?"


손님은 가만히 아르바이트생을 쳐다봤다. 


"침 다 들어간 걸 어떻게 먹으란 말이에요? 더럽게."


아뿔싸. 그제야 실수를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바로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 조아리고 사과하고 허둥대는 아르바이트생을 보던 손님은 깊은 한숨을 쉬며 됐어요, 하고 떠났다. 그날은 더 이상의 실수는 없었지만 도무지 일을 제대로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위로하던 동료 언니의 토닥임도 닿지 못했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아예 그날을 잊어버리거나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손님의 긴 한숨이 내 심장을 저 바닥까지 누른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참 어렸다, 싶다. 손님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카페에서 일하는 앳된 얼굴의 아르바이트생들을 보면서 문득 그날이 떠오르면, 그래도 나는 좀 더 나은 어른이 되어야지 생각한다.


달그락, 유리컵 안의 얼음이 부딪히며 나는 청량한 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신다. 그땐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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