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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Dec 23. 2020

창밖의 연말


            푹한 날씨가 연달아 이어진다. 사실은 잘 모르겠다. 올여름 날씨가 무척이나 더웠다는데, 그것도 잘 모른다. 한창 코로나가 기승이라 꼼짝없이 두 달간 재택근무를 했었기 때문이다. 12월에 접어들면서부터 올겨울은 유독 따뜻하다고 느꼈지만, 실은 엄청난 한파가 몰아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도 한 여름과 마찬가지로 재택근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살갗을 엘 듯한 바람을 느끼기보다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추위를 짐작하는 게 더 익숙해졌다. 이십사 도 전후를 맴도는 방 안에서 봄여름 가을 겨울을 맞이하고 보냈다. 그리고 어느새, 에어컨과 보일러의 가동으로 계절의 변화를 짐작했던 2020년을 마무리할 시기가 왔다.


Photo by Chloe Ridgway on Unsplash


            회사원의 연말은 역시 잔여 연차를 몰아서 쓰는 순간에 강렬히 실감 나지 않을까. 팀원들은 서로 업무 공백이 겹치지 않도록 촘촘하게 휴가 일정을 조율했고, 설사 공백이 생긴다 하더라도 이 시기에는 굵직한 업무가 없어 큰일은 아니다. 올해 이직한 나는 잔여 연차가 별로 없어서 12월 30일까지 최후의 1인으로 남아 성실히 근무할 예정이다. 달력을 되짚어 딱 1년 전이었다면 이런 경우에 겉으론 별일 아닌 듯 괜찮아요,라고 했겠지만 속으로는 아까운 연말 휴가를 피눈물 흘리며 꼽아보고 있었겠지. 하지만 올해는 유난히 변수가 많았던 해다. 활발한 사교인은 아니었지만, 몇몇 모임과 문화생활은 꾸준히 해왔던 편인데도 올해는 캘린더가 텅텅 비었다. 연말이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다. 연차를 쓰든 안 쓰든 할 일이 없어 피눈물 흘릴 일은 없다.


            외출이 제한된 일상이라면 소비도 줄어들어야 맞지 않을까. 모임, 미술관, 데이트를 나갈 때 갖춰 입을 의류와 외식에 들어가는 비용이 없으니까 응당 소비도 줄어야 맞을 텐데, 우리나라 유통업계는 정말 일을 잘한다. 전직 유통업 종사자로서 창의성으로는 어디 가서 안 지는 집단이 대한민국 유통업 마케터라고 확신할 수 있다. 휴대폰만 손에 쥐면 뭐 그렇게 살 게 많아지는지 모르겠다. 30년 가까이 모르고 살던 물건의 필요를 10초 만에 일깨워 주는 파괴적인 마케팅 덕에, 위에 언급한 분야에서 줄어든 소비는 고스란히 홈 인테리어와 레스토랑보다 다양한 라인업의 메뉴로 냉장고를 채우는데 들어갔다. 그럼,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아닌가? 아니더라. 가뭄에 콩 나듯 있는 외출에는 괜히 마음에 꼭 드는 옷을 입고 싶어 이전이라면 가격에 망설였을 원피스와 코트를 담대하게 할부 결제했다. 그래서 결론은 12월도 마이너스다.


Photo by Jason Leung on Unsplash

 

           그러고 보니 이번 주가 크리스마스다. 매일 같이 캐럴을 틀어놓고 일을 하면서도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된 이유는, 역시 캘린더가 비었기 때문이다. 캐럴은 추천 영상에 뜨는 걸 자동 재생으로 설정해 놓아 흘려들을 뿐이었다. 음악 영상을 틀어놓는 건 일 년의 삼분의 이 정도를 홀로 집 안에서 보내면서 생긴 습관이다. 책이든 글이든 대부분의 일을 할 때 정적이 편한 나로서는 큰 변화다. 올해의 유난한 칩거 생활은 정적이 외로움을 증폭하는데 탁월하다는 걸 알려줬다. 캐럴보다 웃긴 건, 거실과 베란다 사이의 유리문에는 벽걸이형 트리도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반짝반짝 전구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방을 빛내주고 있는데, 분명 그건 내가 이주 정도 전에 샀던 트리임에도 나는 이번 주가 크리스마스인 걸 감쪽같이 까먹고 있다가 친구가 오후에 보내준 크리스마스 카운트다운 영상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 영상에선 크리스마스까지 남은 시간이 화면에 표시되고, 산타 할아버지가 트리를 곁에 놓은 아늑한 침대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다. 끊임없이 캐럴이 흘러나오고, (아마도) 남은 시간이 0이 되면 ‘메리 크리스마스!’ 하며 산타 할아버지가 일어날 것이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이 산타 할아버지와 함께 맞이할 예정이다.


            크리스마스는 아무래도 연말이겠지. 이제 올해를 보내야 한다. 이 맘 때면 몸에 밴 것처럼 하던, 새해에는 열심히 살아야지 하며 버킷리스트와 월별 계획을 화려하게 세우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실천이야 어찌 됐든 계획을 세우는 게 연말의 적잖은 재미인데 말이다. 묘한 허무와 탈력이 마음을 감싸고 있어 그렇다. 신년 계획의 대부분이 올해 하려고 했으나 못 했던 것으로 채워질 것 같다. 누군가는 ‘올해는 아무것도 안 한 게 제일 잘한 거야.’라고 말했다. 그게 옳다는 건 알지만 올해를 송두리째 빼앗긴 것 같은 허탈함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겠지.


Photo by Yoab Anderson on Unsplash


            12월에 잡지를 몇 권 읽었다. 어반라이크 41호에 담긴 문보영 시인의 에세이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재택근무를 소재로 집을 러닝머신에 비유했다.

집은 러닝머신과 비슷하다. 러닝머신의 멋진 점은, 제자리에서 몇 킬로를 갈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점이 자신보다 크고 긴 거리를 품고 있다. 러닝머신에서는 얼마나 걸었는지 체감이 잘 안된다. 아무리 걸어도 여기니까. 하지만 나는 내가 멀리 왔다는 걸 안다. (어반라이크 41호, 문보영 '따뜻한 제자리걸음')

            그래서 이 에세이의 제목은 ‘따뜻한 제자리걸음’이다. 올해를 보내는 허무와 탈력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것 같은 기분에서 비롯됐다. 이십사 도의 방 안에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어서, 다른 이들은 피니시 라인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형태도 정체도 없는 사냥꾼에 쫓기는 듯한 그런 불안을 들킨 것 같았다. 제자리걸음으로 어디도 가지 못한 게 아니야. 그 간의 걸음이 발밑에 차곡차곡 부피를 더해가고 있을 거야. 그런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주요 업무 중의 하나는 매주 앱에 노출되는 메시지를 변경하는 것이다. 주로 시즌 별로 할 만한 이벤트를 제안하는데 최근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 고민을 거듭했다. 맛집으로 길 안내를 할 수도, 예매 1순위 영화를 추천할 수도, 나들이 가기 좋은 날씨를 알려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할 이야기가 있어 다행이었다.


올 한 해도 수고했어요. 메리 크리스마스!


모두 수고 많았습니다. 나도, 당신도, 창밖을 보며 연말을 맞이할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Cover Photo by Filip Gield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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