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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Sep 01. 2020

아프게 글 쓰는 것부터

지금 마주하지 않으면 곪을 것 같아서


글이 작가의 아픈 곳을 찌르지 않으면 제대로 써질 수 없다고 했었나. 도무지 쓰고 싶지 않았던 아픈 글을 이제는 미루기 힘들 것 같아 살펴보기로 했다. 언젠가 오피셜 작가로서 부끄럽지 않을 글을 쓰기 위해 지금은 아프게 글 쓰는 것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제 좌우명은 Dramatic이에요.
모든 사람의 삶은 드라마고, 그들이 삶의 주연이니
어느 인생이든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22살 즈음 나를 표현하는 멋진 하나의 단어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 고민한 것이 ‘드라마틱’이다. 사람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성향과 꼭 맞아 꾸준하게 나를 소개할 때 쓰고 있다. 단순히 멋있고 싶어 정했다기엔 그때의 나는 생각보다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나 보다. 여전히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눈길이 닿고 귓가에 머물고 떠오르는 생각을 나의 단어로 나타내는 일을 좋아한다. 나른하게 앉아있는 시간에도 머릿속은 바삐 상상하며 울컥하고 환호하고 인물의 이야기를 그리면 내심 벅차다. 단지 좋아하는 걸로는 부족하여 에세이 모임, 소설 창작 학원, 아카데미, 브런치까지 이곳저곳을 다니며 이야기를 읽어주길 바랐다. 내 글의 유일한 독자는 나인 것만 같아 외로웠다. 새벽의 노트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텅 빈 도시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 기분. 누구든 내 글에 답해주면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으로 동지를 찾아다녔다.




인터넷에 게시한 글에 댓글이 달렸다. ‘글이 재미있어요.’라는 말에 환호성을 지르다가, 그게 한 명이라도 더 내 글을 읽어주길 바라는 욕심으로 번졌다. 그러자 정말 웃긴 상황이 일어났다. 내가 좋아해서 쓰는 글이 아닌 읽어주는 이가 좋아하는 글을 써야지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거다, 자꾸. 그게 아닌데. ‘가장 개인적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명언을 많은 창작자들이 가슴에 새긴 이유가 있을 텐데.


지금껏 내가 외치는 ‘드라마틱’에 나의 드라마는 없었다. 한 번도 나의 삶은 어떤 드라마인지, 주인공의 행동의 이유를 솔직히 말한 적이 없다. 나의 드라마는 정말 나만이 독자로 남기 위해 일기장에 토해내고 깊이 숨겨뒀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니까. 그리고 누구도 그런 걸 읽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이야기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글을 쓰면서도 ‘내가 이걸 왜 쓰고 있지?’라는 생각이 끝없이 들었다.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게 낙이자 하루의 위로였는데 모든 게 허무해지니 처참한 마음이 들었지.


왜 글쓰기를 좋아할까 들여다봤다.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건 참 쑥스러운 일이다. 동시에 무섭고 두려운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대로 평생의 즐거움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용기 냈다. 허무하게 느껴진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서 고쳐야겠기에.




시작은 일기였다. 상처 받고, 실패하고, 외롭고, 견뎌 내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일기에 토해냈다.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조차 지칠 때, 일기는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고 위로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러니 나는 스스로를 유감없이 내보이는 글을 쓰면서 위로와 치유를 받았고, 그래서 글이 좋았던 거다.


위로받기 위한 글을 쓰는 건 과정이 참 아프다. 깊은 구덩이를 파서 아픔을 넣고 잘근잘근 밟아 땅을 다져 놨는데, 어디선가 썩은 내가 난다. 그때 묻은 아픔이 곪아 나는 냄새라는 걸 알면서도 쉽게 파낼 수 없다. 너무 깊이 묻었고 얼마나 썩어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기에 두렵고, 힘들다. 그대로 놔두면 누구도 나의 못난 부분을 모를 텐데 굳이 파내야 할까 싶으면서도, 아무래도 그게 노트북 앞에 앉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 같아 건드려보기로 했다.




17살 무렵, 교내 문학 동아리에 들었다. 시, 소설, 혹은 에세이를 자유롭게 쓰고 나누는 활동이 주였다. 일주일에 한 번, 야간 자율 학습 대신 8명 정도 둥글게 의자에 앉아 한 명씩 일어나 자기의 글을 낭독하고 후기를 듣는 일이 좋았다. '나와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8명이나 있어!' 이런 기분. 동아리에서 낭독하기 위해 A4용지 반 정도 되는 짧은 글을 썼다. 지금은 그게 무슨 내용인지 아쉽게도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걸 무심코 식탁 위에 뒀다. 방에서 공부를 하는데 갑자기 부모님이 종이를 손에 쥐고 들어와선 놀란 눈으로 물었다. 


“딸, 이거 네가 썼어?”


순간 부끄러웠다. 비밀을 들킨 것 같았다. 아니야, 거짓을 말하며 고개를 젓다가 엄마 아빠의 얼굴을 봤다. 내 대답이 나오기 전의 놀라움과 그 후의 어쩌면, 안도감. 


그보다 어릴 적 4년 동안 미술을 했었다. 시 단위의 사생대회에서 꽤 많은 상장을 받았다. 그리하여 한 때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지만, 좀 더 빨리 장래 희망을 확고히 한 언니가 디자이너의 길을 걸었다. 다음은 운동을 했다. 종목은 태권도, 유소년 시범단에 들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날아 차기로 송판을 부쉈다.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고 호기롭게 외치던 내 말에 엄마 아빠는 말이 없었다. 얼마 뒤, 교사인 큰삼촌이 집으로 찾아와 운동선수의 장래가 얼마나 불투명하며 성공하기 힘든 지에 대해 논했다. 무릎을 꿇고 엉엉 울며 그 얘기를 듣기를 몇 차례, 운동을 관뒀다.


교복을 입던 무렵에는 은연중에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걸. IMF가 한 차례 휩쓸고 간 뒤, 부모님은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어떻게든 공장을 일으키려 노력했다. 그 와중에 미대를 준비하는 첫째, 돈 꽤나 잡아먹는 꿈만 꾸는 둘째, 한창 자라야 할 늦둥이 막내, 이 셋의 장래를 여유롭고 살뜰하게 챙겨주기란 여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 못나지 않은 머리를 가진 나로서는 큰 보살핌은 없어도 되는 보편적이고 안정된 길을 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게 효도인 줄 알았다.




그러니 나는 ‘아니야’라는 대답에 설핏 안도하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고 내심 꿈꾸던 문예창작과도 마음에서 지웠다. 상상하고 읽고 쓰는 걸 좋아하는 어린이에서 그 일로 평생을 살고 싶어 하는 청소년으로 자랐지만, 글에 미래를 건 성인이 되지는 못했다. 겉으로는 ‘다양한 기회가 열려 있을 것 같아’서 경영학과를 지원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대기업에서 선호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내 힘으로 안정적으로 나를 먹이고 재우고 하는 일이, 셋 중에 하나의 부담은 부모님에게서 덜어주는 일이라 여겼다.


수능을 치르고, 지원하지도 않을 거면서 ‘문예창작과 진로, 국문학과 진로’ 이런 단어를 수 십 번 검색했다. ‘꼭 문예창작과 나 국문학과 출신이 아니어도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다른 배경의 글을 선호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런 말을 찾으려 들었다. 그래, 글은 언제고 배우고 쓸 수 있어. 나는 경험을 쌓으려는 거야. 잘못 선택한 게 아니야. 그렇게 위로했다.


먼 타지에 와서 회사를 다니며 나 하나를 건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보편적이고 안정적으로 사는 일’은 글로나 잘 써지지, 뭐 하나 쉽게 되는 게 없었다. 그렇게 글 쓰지 않는 삶에 아등바등 적응하다가도 밤 깊을 때 침대에 누워서 허한 마음에 눈물이 툭툭 났다. 기록되지 않는 하루하루만 흘러가니, 나이는 먹어도 마음은 여전히 ‘아니야’하며 고개를 젓는 그 시절에 머무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일기로 시작했다. 글쓰기가 아프게 다가오지 않고, 좋아졌던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몇 번, 도망치고 싶다. 괜히 눈물이 나고 가슴에 훅 찬바람이 드는 데 이대로 관두면 맹물의 글만 쓰는 사람이 되어 버릴까 두렵다. 그래도, 아프게 글 쓰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지금 마주하지 않으면 곪아서 치유하기 어려워질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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