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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Aug 18. 2020

칭찬이 고픈 어른

어른이지만 아이처럼 칭찬을 듣고 싶어요.


좋은 대화의 방법 중 하나는 칭찬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두루뭉술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칭찬해서 호감을 사는 것. 어느 책인가 에세이에서 읽었던 그 사실은 출처를 언급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글에서 다뤄졌고, 굳이 진리인 듯 ‘~하다.’라고 끝맺지 않아도 일상에서 깨우친 사람들이 많겠지. 그런데, 무심결에 흘려 읽은 글귀였을지도 모르는 그 문장이 그토록 내게 와 닿았는지.




아니라고 열심히 부정했지만 이쯤 해서는 지쳐서 인정해버린 나의 특성은 사람들의 눈을 많이 신경 쓴다는 것이다. 남의 눈에, 사회의 잣대에 나를 맞추지 않고 당당하고 개성을 표출하는 게 유일하게 옳고, 그렇지 않으면 자존감이 낮고 볼품없는 무채색 인간이 되어버리는 분위기에서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해요.’라고 인정하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그래요. 저는 남들 시선에 나를 맞추려 한 적이 많고, 지금도 종종 그러고 있습니다. 줄이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앞으로도 가끔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다정하고 배려있게 행동하게 된다. 시선을 의식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나를 향한 그대들의 관심이나 혹은 나의 잘남에 대한 시기, 질투 따위로 여겨 시선을 즐겁게 누리는 것. 두 번째는, 나의 잘못에 대해 눈여겨보는 행위로 받아들이는 것. 전자의 방식으로 시선을 받아들일 만한 담대함이 없어 대체로 후자가 나의 방식이다. 사회에 나와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며 여기저기 치이고 깎이며 ‘생각보다 훨씬 더 타인은 내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체감하기 전까진 홀로 시선을 의식하느라 많이 고달팠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나 보다. 나는 대체로 다정하고, 평균 이상으로 배려를 발휘한다. 낯선 상대일수록 정도가 심해진다. 의식한 행동이 아님에도 종종 ‘다정하시네요.’라는 말을 들으면 칭찬으로 듣고 넘기려 하지만, 시선 감옥에 갇혔던 시절이 자연히 생각나 씁쓸함도 같이 넘긴다. 대화에도 습관이 박혔다. ‘구체적으로 칭찬하는 것’. 점심으로 다이어트 도시락을 챙겨 오는 옆자리 대리님에게 아침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함과 내 몫까지 방울토마토를 싸와주는 넉넉함에 대해서 칭찬했다.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왕래가 없던 중 자신이 겪었던 힘겨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취한 것에 대해서 쉴 새 없이 늘어놓는 친구에게 하나씩 짚어주며 ‘~가 어려웠는데도 어떻게 견뎌냈어?’, ‘그런 상황에 대처를 참 센스 있게 잘했다.’는 유형의 말을 마찬가지로 쉴 새 없이 반복했다.


가식적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칭찬은 상대의 행동이나 마음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것에 나는 분명 감명받았으니까. 보통 ‘고맙다’고 끝날 것을 ‘나를 위해 아침 시간까지 할애해줘서 고맙다’고 표현하는 것이니 가식적이라고 할 순 없다. 그러나, 뭐랄까... 갑자기 공허한 기분이 밀어닥칠 때가 있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에 참석했다. 글 창작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서로의 작품을 공유하고, 피드백을 나누는 모임. 아픈 말일지라도 소화해야 작품은 더 나아진다. 예방주사를 맞는 기분으로 참여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굵은 주사 바늘에 눈물을 쏙 빼기가 일쑤다. 고질적인 시선 의식이 만들어준 다정함은 피드백을 줄 때도 발휘한다. 일단 좋은 점 먼저, 최대한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그러고 나서 수정되면 좋을 부분(고칠 부분이 아니다. 수정.)을 전하고, 당신 작품의 멋진 가능성에 대한 의견으로 마무리한다. 여기에는 같은 공부를 하는 상대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함께 해줬으면 하는 바람도 섞여있다. 그런데, 돌아오는 피드백은 좀 달랐다. 잔인하게 내 작품을 난도질한 것은 전혀 아니지만, 수정 외에 ‘재밌어요’도 있지만, 그래서 어디가 어떻게 좋은 건지 알려주는 이는 없다.




더 솔직해지자면, 내가 구체적으로 칭찬하는 이유는 그런 칭찬을 받고 싶어서다. ‘너는 좋은 사람이야’가 아닌 ‘너는 ~서 좋은 사람이야’를 듣고 싶다. ‘다정하시네요’가 아니라 ‘~서 다정하시네요’가 듣고 싶다. ‘재밌어요’가 아니라 ‘~부분이 재밌어요’가 듣고 싶었던 거다, 사실은. 자기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늘어놓고 위로받기를 원하는 오랜 친구에게 똑같이 내가 견뎌낸 힘겨움과 애정을 갖고 하는 일에 대해 말하고 응원과 칭찬을 받고 싶었다. 그런 만남 후에는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한동안 멍해지기 마련이다. 나의 마음에서 내보낸 다정함과 배려는 어디로 흘러갔을까. 그런 따뜻한 것은 나누면 배가 되기 마련이라는데, 흔적 없이 사라진 온기를 떠올리며 깡통 로봇 같은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남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상처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타인이 내게 무해했으면 좋겠어서, 무해한 사람이 되길 원하는 이들. 내게 따뜻한 말을 전해주면 좋겠어서, 따뜻함으로 다가가는 사람들. 칭찬받길 원해서, 칭찬하는 사람들.


유치원에서 쓰던 칭찬 카드가 있다. 알이 큼직한 포도가 그려져 있고, 착한 일을 할 때마다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포도 알에 붙인다. 포도 한 송이가 채워지면 상품을 받았다. 간식일 때도 있고, 스케치북이나 연필 한 다스 같은 것일 때도 있었다. 어른들도 칭찬 카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타인에게 좋은 말을 할 때마다 칭찬 스티커가 붙고, 그게 완성되면 달콤한 상을 받는 거다. 그리고 그 상은, 누군가의 진심이 담긴 칭찬이어야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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