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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Feb 01. 2021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넷플릭스 스토리텔러: 익스팅션 - 종의 구원자

※ 이 리뷰에는 '익스팅션: 종의 구원자'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은 딴 건 아무것도 없어요. 실업자 양산하는 구좁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어느 강연에서 말했다.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일자리를 죽이는 사(死) 차 산업혁명이 될 것이라고. 그 문제의 4차 산업혁명이 어떻길래? 여기, 넷플릭스 오리지널 ‘익스팅션: 종의 구원자’가 보여준다. 4차 산업혁명이 전 세계를 휩쓸고 난, 머지않은 미래를. 물론, 영화적으로.




        얼핏 한참이나 늦은 중2병을 겪는 듯한 중년의 남자가 있다. 아내와 2명의 딸,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조건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남자, 피터다. 그는 최근 악몽을 꾼다. 갑자기 하늘에서 비행선이 나타나 길 위의 사람들을 모조리 쏘아 죽이는, 대학살의 꿈. 그는 불안하다. 악몽이 단지 꿈이 아니라, 예언 같다. 너무나 생생하고 두려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속에서 그는 피투성이 주먹으로 누군가를 때리기도 하고, 그의 딸들은 엉망으로 길 위에서 울고 있다. 신경을 갉아먹는 악몽이 일상까지 망가뜨린다.


        가족과 동료는 그의 과대망상을 우려하며 정신과 치료를 권한다. 병원 로비에서 그와 똑같은 증상을 앓는 사람을 만난다. 심상치 않은 징조를 느낀 그는 치료받지 않고 병원을 나선다. 며칠 뒤, 아내 앨리스의 승진 축하 파티를 기점으로 피터는 그들의 우려에서 해방된다. 실제로, 의문의 비행선이 온갖 사람들을 쏴 죽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피터의 안락한 집이 있는 아파트도 타깃이다. 방금 전까지 웃고 음식을 나누던 이웃이 난사된 총에 맞아 쓰러지는 아비규환에서, 피터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빠르게 진행되는 전반부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물음표가 머릿속에 계속 떠다닌다. 피터는 왜 꿈을 꾸고, 그 꿈은 왜 현실이며, 왜 사람들이 죽어야 할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다 중반부에서 ‘아!’하고 퍼즐이 맞춰진다. 피터, 가족, 동료, 그리고 지구에 발붙인 모두는 인간이 아니다. 50년 전 본인들을 창조한 인간을 화성으로 몰아내고 지구를 차지한 ‘합성물(synthetic product)’이다. 인간이 그들을 그렇게 명명했다. 태초에 인간으로 태어난 그들은 천연물, 그들이 창조한 AI 로봇은 합성물. 차별이고 무례한 명명이다. 이름뿐만 아니라, 대하는 태도 또한 그랬다.




        밥은 인간에게 연료다. 먹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기에 움직임을 동반하는 모든 행위가 제한된다. 동물인 인간이 먹지 못한다면, 존재할 수 없다. (하물며 식물도 밥은 필요하다) 어렵지 않게 사회경제 뉴스 메인에서 찾을 수 있는 밥그릇 싸움에 처절하고 절박하게 임하는 이유도 결국은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해서다. 인간은 그래서 자신이 창조한 합성물에 위협을 느낀다. 본인들의 일자리를, 밥그릇을 침범하는 적대적인 존재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창조했지만, 그 편의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며 종래엔 인간의 밥그릇마저 위협한 것이다. 인간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만들어서 문제가 생겼으니, 없애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인간은 합성물을 제거하기로 한다.


        합성물은 신체 내부가 기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인간과 같다. 그러나 인간의 지배 아래 합성물들은 ‘인간답게’ 살지 못했다. 왜 인간의 도구가 되어 학대받다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죽음 당해야 할까. 그래서 합성물은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 자신들을 사냥하는 인간에 대항해 지구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합성물은 인간을 몰아내고 ‘망각’을 택했다. 최하층에서 천대받던 기억을, 인간을 죽인 두려움을 지우고 희망차게 ‘살아보기’ 위해서. 그 후, 인간이 살던 집에 터를 잡고, 인간의 직장에서 업무를 하고, 인간과 같이 이웃과 교류하고, 즐기고, 먹고, 마신다. 이즈음에 또다시 의문이 생긴다. 인간과 동일한 외모에 추구하는 가치와 충족하려는 욕구가 모두 같은, 심지어 희로애락의 감정을 소유한 그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합성물의 승전 후 50년, 인간들은 화성에서 심기일전하여 지구를 되찾으러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습은 마치 인간이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합성물의 일상을 파괴하고 보금자리를 빼앗는 것 같아 보인다. 앨리스를 살려준 인간은 화성에서 태어나 자랐고 할아버지에게 지구와 합성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다. 그는 합성물에 대한 모든 이론을 배웠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지구에 와서야, 자신의 총 아래 쓰러지는 아무리 봐도 인간과 같고, 인간처럼 살던 이들이 합성물이라는 사실을 맞닥뜨린다. 그들은 심지어 가족이 있고,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며, 인간의 손에 쓰러지는 아이와 배우자를 울며 끌어안는다. 대체 인간은 무엇을 죽이고 있는 걸까. 합성물을, 그들의 일상과 가족을, 사랑을, 기계 따위로 치부할 수 있을까.




        영화의 말미에 던져지는 물음이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세상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며 진화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난 이제 내가 누군지 적이 누군지 안다. 우리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다른 이들도 그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에겐 미래가 있을 것이다.”


        모 통신사에서 AI 상담사를 내놨다. AI가 뉴스 기사를 쓴다. 바리스타 뺨치는 커피 로봇이 있다. 셀프 쌀 국숫집과 무인계산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식당에는 로봇이 음식 주문을 받고 서빙한다. 드론이 배달하고, 자율주행 자동차가 도로를 누빌 것이다. 빅데이터를 활용해 투자하는 펀드매니저 로봇이 개발 중이고, 낮밤 기후에 영향받지 않고 공사하는 로봇이 나타날 테고, 감정을 가진 합성물과 같은 존재는 고유한 인간의 영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예술까지 어렵지 않게 파고들 것이다. 그 모든 변화의 뒤에 인간이 남는다. 말 그대로, AI에 밥그릇을 뺏긴 인간들. 이런 변화를 감히 막을 수는 없는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우리가 보는 것보다, 종의 결말은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묻는다. 인간종의 결말이 다가오는데, 이 미래를 결말이 아니라 ‘구원’으로 바꾸려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변화를 대해야 할까?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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