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풍경 중에서 세상 제일 아름다운 풍경

by 신순배

나이 들어 염치라도 있어야지. 색색의 머리 애젊은 손님 셋을 뒤에 두고 희뜩이는 머리칼로 앉아있는 꼴이라니. 군학일계 처지에 이래저래 훈장질을 더 하니 사람 좋은 미용실 실장님도 결국 군소리를 낼 수밖에. 전부터 툭툭대는 말투에서 뜻을 읽긴 했어. 서너 번 들었으면 이제 떠날 때도 됐지. 장날, 발 잰 할멈 손 꼭 그러쥔 할아비처럼 익숙한 것에 악착같이 붙어살아 가야 하는 나이임은 알지만, 결국 낡은 것들의 숙명이란 떠나고 사라지는 것이렷다. 부러 큰 인사 떨구고 나왔는데 ‘때를 알고 가는 나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라.


수은등 하나 있었으면 싶은 좁다란 오르막 골목 끝자리. 아랫도리가 녹슨 3색 사인볼이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백반증 심한 시트지 문을 여니 백발의 이발사가 꾸부정한 몸을 시원찮게 일으키며 돌아본다. 어디서 흘러 들어온 놈인가 하는 표정으로 훑더니 시답잖은 목소리로 “어섭쎠”.


아귀가 틀어진 옷장과 꼬질꼬질 때 입은 소파. 아직도 우횡서를 고집하는 『성사만화가(家和萬事成)』 액자가 벽에 걸려 세월의 증발을 견디고 있다. 옆 벽면으로는 괘종을 흉내 낸, 적당히 낡은 원목 시계가 소멸의 운명을 완강히 거부하며 시간을 지휘하고 있다. 세월에 떠밀린 존재들의 버티기가 제법인데 요샛말로는 ‘존버’라 한다지?


미용실에서 40년 굴러먹다 퇴출당한 놈이라 밝히고는 이발 덧옷을 두르고 앉았다. 맞상대한 증) 라이온스클럽 거울 속에는 초로의 늙은이가 웬일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앉아 있더군.


손가락으로 뒷머리를 툭. 아, 그렇지. 이발에도 루틴이 있다. 뒷머리를 치면 머리를 숙이고 옆머리를 치면 반대편으로 기울여야지. 양쪽 관자놀이를 잡으면 제자리로. 몸이 따라서 반응하는 걸 보니 아직 뇌에 주름이 남아 있기는 한 모양.


10년을 부려 먹은 일소 같은 바리캉이 시원찮은 소리를 낸다. 목덜미 뒤를 먼저 훑더니 내처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구레나룻까지 잘라내고는 퇴각. 빗과 가위가 이어받는다. 째깍째깍 소리에 사각사각 잘려 분분히 떨어지는 머리카락. 이발 의자가 젖혀지고 면도 거품이 얼굴 턱선을 따라 덮는다. 넉가래로 마당 눈 치우듯 길을 낸다. 스릉스릉, 며칠 방탕하게 자유를 누리던 수염을 일거에 척결하는 금속음. 눈이 스르르 감긴다.


선듯 든 기억 하나. 흰 가운과 가위가 무서운 아이는 덧옷에 떨굴까 봐 연신 콧물을 빨았다. 머리도 감지 않고 달음질로 돌아왔더니 뒷머리가 왜 ‘그따구’냐며 어머니가 냅다 손목을 낚아챘다. 뒤에 눈 없는 아이가 알 수는 없는 노릇. 바닷가 돌팔매질에는 늘 짱 먹지만 평생 물질로 우악스러운 팔 힘에 버틸 도리가 있나. 뒤통수 맞으며 갈지자로 끌려가는데 눈물이 줄줄 콧물은 질질. 어머니와 언성이 높았던 이발사가 뒷머리를 튕기는데 무하마드 알리에게 딱밤 100대는 맞는 줄.


돌아오는 길에서는 내리막에도 걸음이 느려지더군. 아마 40년쯤 지났을 거야. 시인과 촌장이 불렀던 노래가 떠올라 흥얼거렸어.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4분 동안, 이 가사만 반복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신기하게도 질리지 않아. 반백을 훌쩍 넘은 나이에서야 되돌아온 이발소, 제자리를 지켜 준 오래된 것들에게 고맙다고 해야지. 허름한 골목 다방에서든, 변두리 이발소에서든, 하다못해 박물관 유리 상자 안에서라도 장날의 할아비처럼, 우횡서 액자처럼, 길길거리는 바리깡처럼 버텨주는 존재들. 세상 밖으로 내몰리는 나이 든 것들이 언제든 돌아갈 낡은 자리 서너 곳쯤은 있어 줘도 괜찮잖아? 지금 제자리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억지로 갖다 붙여봤지. 그 뜻이 아닐 텐데 너무 자기중심적 사고 아니냐고? 그럼 난 비틀즈로 비틀지. Let it be!


“또 오슈.”

“아유, 그럼요. 3주 뒤에 오겄슴다.”


집에 들어서자 뜬금없는 이발소라 걱정했던 아내가 한마디 한다. “뒷머리가 너무 짧네.” 어른이 됐어도 나는 알 수 없는 노릇. 대자로 눕든 사지를 문틀에 걸고 늘어져 버텨보든 결사 항전의 의지를 품었으나 천만다행으로 ‘그따구’까지는 아니었던 모양, 끌고 가지는 않았다.


제길, 아침 칼바람에 집을 나서는데 뒷머리가 엄청 시리기는 하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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