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그렇습니다.
한바탕 비가 지나갔다.
번쩍, 우르르 콰광! 그리고 쏟아지는 비.
비가 쏟아지는 바깥을 하염없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엊그제 큰 애랑 통화한 일들이 떠올랐다.
지인 소개로 어떤 그룹에 속해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시간과 정성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취준생인 자기에게 조금 버겁다고. 엄마는 어찌 생각하냐고 물었다.
힘들면 그만하라고 했다.
네가 살아가는데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 권한 일이나
네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꽤 단호한 나의 답에 딸은 좀 의외라고 말하며 웃었다.
어째서냐고 했더니,
엄마는 항상 입버릇처럼 어떤 일이든 맡았으면 끝까지 최선을 다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냐고.
언제나 엄마의 그 '열심히'와 '최선을 다해'라는 요구가 참 힘들었다고 했다.
아이의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나의 삶에서 나는 왜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가.
돌이켜보면 나는 내가 맡은 일이나 인간관계에서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 아니라,
내 모든 걸 쥐어짜 내며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그리고는 지쳐서 뒤로 나뒹굴게 되면 그 길로 돌아서서 다시는 그 일과 그 관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워 버렸다.
친구가 늘 입버릇처럼 내게 말했다.
'너를 갈아 넣는 일은 하지 마라'
그러나 멍청한 나는 금방 그 조언을 잊고 다시 나를 달달 갈아서 넣어 버린다.
어린 시절 엄마는 항상 우리에게 '열심히'를 강요했다.
1970년대, 열심히 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힘든 시절이었으니까.
나이 든 엄마는 아직도 중년의 딸들에게 빈둥거린다면서 가끔 비난을 한다. 늙어서 거지처럼 살려고
그리 빈둥거리냐고. 죽으면 썩을 몸뚱이를 아끼면 뭐 하냐고.
그러다가도 내가 아파서 드러누우면 자기 조절을 못한다고 다시 질책을 한다.
나는 평생 내 엄마에게 나의 속내를 다 털어놓지 못하고 살아왔다.
엄마에게 비난받는 딸로 사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엄마의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는 타령이 그렇게 싫었음에도
나도 모르게 내 딸들에게 나는 그걸 강요하고 있었나 보다.
미안함에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언젠가 작은 애가 그런 말을 했다.
엄마처럼 살라고 하면 안 된다고. 엄마는 가만히 있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 같다고.
그때는 그 말이 칭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말은 비꼼이었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엄마의 잔소리에 거의 세뇌된(그때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을 알지 못했다)
나는 한순간도 편히 다리 주욱 뻗고 놀아 보지 못한 것 같다.
놀면서도 눈치 보고 쉬면서도 불안하고.
심지어는 외국여행을 하면서도 쉬는 게 눈치가 보여
장기간 머물렀던 사하라의 호텔에선 아침마다 청소를 했다. 습관이란 참 무서운 거였다.
제주도로 내려온 이유도 그런 빠듯한 일상의 탈출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제주도에서의 시간을 되돌아보니 나는 여전히 죽을힘을 다해 뭔가를 하고
탈진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가 움직이고 일을 하는 공간에서 홀로 쉬는 것이 너무나 불편하다.
조용한 공간에서는 손님일지라도 주인이 일을 하고 있을 때 가만히 있는 것이 몹시 불편하고 힘들다.
어디서든 내가 할 일이 보이면 일어서게 된다. 그런 나 자신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음에도 말이다.
사람들은 자주 호의를 베풀면 그걸 자기의 권리처럼 알고 나중에 내가 더 이상 호의를 베풀지 않을 때 서운해하거나 화를 낸다.
그래서 나는 나를 지키는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간의 선과 그리고 그 선과 선 사이의 간격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이내 선의라는 명목으로 그 선을 내 발로 뭉개고
그 대가로 나를 추켜주는 칭찬을 받으면 족하다고 생각하며 살았고 아직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 대가는 결국 내 몸의 망가짐으로 연결되었다.
내 몸의 망가짐과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건 결국 내 몫이고
그런 과정들이 반복이 되는 동안 나는 지친다. 결국은 그 관계에서 다시 도망친다.
멍청하다.
어린 시절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채워지지 못한 탓일까.
스스로를 좀 더 차분하게 돌아보고 나에게 더 집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