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딸기를 위한 고백

뭘먹든

by 랄라

올해는 찬 바람이 꽤 길게 분다.

제주살이중 가장 좋은 점은 산책이다. 동네의 조용한 올레길을 걷거나 이른 아침 바람이 잠든 숲을 걷기도하고, 파도치는 바닷가를 걷기도 한다. 어디를 가도 걷기에 좋은 장소가 있는 곳이 제주다.

5월은 산책을 하기에 더할나위 없는 계절이다. 산책길에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열매가 있어 더욱 멋지다.


이른 봄 여기저기 징글징글하게 올라오는 덩굴을 걷어냈다. 덩굴은 작게 올라와도 금방 세력을 넓히고 여기저기 나무와 풀들에 기대 자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쁜 덩굴이라 생각해 마구 뽑아버렸다. 조그맣고 흰꽃이 달리기 전까지 눈에 띄는 족족 걷어내고 뽑아냈다.

어느 비개인 오후 반짝거리는 흰 꽃이 덩굴에 피어났다. 찔레꽃인가? 기만히 들여다 봤다. 눈에 익은 꽃이었다. 그러고는 그만이었다. 흰꽃이 떨어지고 밤송이같은 몽우리가 맺힌다. 그제야 알았다. 산딸기다.


산딸기는 내 최애 과일이다. 어린시절부터 그랬다. 내가 자란 고향은 유난히 과수원이 많은 곳이었다. 동네 뒷편으로는 작은 산들이 올망졸망 모여있고, 산자락은 복숭아, 배, 포도, 자두와 산딸기가 자라는 과수원이었다. 초여름부터 가을이 끝날 무렵까지 온갖 과일들이 쏟아져 나와, 과일 인심은 섭섭치 않은 곳이었다. 그중 최고는 산딸기였다. 싸고 흔했다.

야산으로 이어지는 동네 뒤쪽 공터는 산딸기 덤불이 가득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산딸기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일단 가시덤불을 헤치고 따기가 힘들었다. 하나를 따면 한입 가득 먹을 수 있는 다른 과일과 달라 한 주먹을 털어 넣어도 별로 맛을 느낄 수가 없다.

초등학교 5학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학교에 갔다 오니, 공터 옆에 사는 이웃 무당할머니가 와 계셨다. 유난히 동생을 예뻐하시던 무당할머니가 동생 먹이려고 산딸기를 한 바가지 따 오신 거였다. 동생은 자기 몫을 야무지게 잘 챙기는 아이였다. 내가 들어서자 혹여라도 뺏길까봐 덜컥 울기부터 했다. 할머니가

“니 혼자 다 무라. 아무도 주지마라. 느그 응가가 조라캐도 절대 주지 마라.”

하시니, 베시시 웃으며 나를 봤다. 양쪽 볼에 눈물자국을 매달고 딸기 소쿠리를 안고 웃던 동생의 얼굴은 참 얄미웠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가끔 그 얄미운 표정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삼남매중 둘째라 어릴 적부터 유난스럽게 자기 몫을 잘 챙겼다.

엄마는 수돗물에 휘리릭 헹군 산딸기를 플라스틱 소쿠리에 받혀 물기를 빼고 양은 양푼이 탁 털어 넣었다.

“딸기는 설탕 맛이다.”

요즘에야 설탕이 죄악의 첫 번째로 꼽히지만, 그때는 귀한 식재료였다. 할머니는 설탕을 뿌리라고 부추겼다. 엄마는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부엌으로 가 설탕을 한 숟가락 넣고 살살 버무려왔다. 하얀 눈 같은 설탕으로 뒤덮인 빨간 산딸기는 아름다웠다. 사실 산딸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탕이 녹아들며 반짝반짝 윤기를 더한 산딸기를 보는 순간 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온전히 자기 편인 무당 할머니가 곁에 있으니, 동생은 당당하게 산딸기 한 그릇을 싹 먹어 치웠다.

유난히 수줍음이 많던 나는 동생이 숟가락으로 한가득 퍼먹는 산딸기 설탕 버무리를 그냥 보고만 있었다. 산딸기보다 달달한 설탕 맛이 너무 간절했다. 하지만 할머니도 엄마도 동생도 나에게 산딸기를 권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권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기억에는 산딸기 양푼을 끌어안고 입 주위로 하얀 설탕을 묻히며 산딸기를 퍼먹는 동생의 모습만 각인되어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둘째를 임신한 막달, 출산을 하러 간 친정에서 다시 설탕에 버무린 산딸기를 마주했다. 열 달 내내 심한 입덧으로 그 무엇도 맛을 모르겠던 입맛이 산딸기를 보는 순간 입안 가득 침을 고이게 했다.

그 순간부터 둘째를 출산하고 한달간 친정집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내내 거의 매일 산딸기를 먹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에게 산딸기가 보이는 시간부터가 여름이다.

내 어린시절에 산딸기는 흔하디 흔했던 과일이었다. 집집마다 산딸기로 술을 담고, 잼을 만들었다. 우리 동네 어른들에게 딸기는 산딸기였다. 요즘 우리가 부르는 딸기를 어른들은 양딸기나 밭딸기로 불렀다. 시절이 바뀌어 이제 그 딸기는 산딸기가 되고, 한주먹에 몇천원이 넘는 귀한 과일이 되었다. 심지어 야산이나 동네 공터 덤불에서 자라던 산딸기를 온실에서 키운다. 이른 4월에도 산딸기를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이 있고, 백화점 한 켠에서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어렸을때는 흔하디 흔했으나 그 맛을 잘 몰라 못 먹었던 산딸기가 요즘은 비싸서 쉽게 사 먹지 못하는 과일이 됐다. 한 팩을 사면 혼자 먹기도 아쉬운 양이다. 몇 년전 심하게 아파 병원에 한달을 입원한 적이 있다. 지인들이 병문안을 올 때 먹고 싶은 걸 물으면 늘 산딸기를 사오라고 당부했다. 5월과 6월로 이어지던 입원기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산딸기를 먹어 의료진들이 놀리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며 가족들이 산딸기에 한맺혔냐고 물었다.

그 순간, 가슴속에 뭔가가 툭 끊겼다.

산딸기는 내게 사랑의 증표같은 거였다. 어릴 적 무당 할머니가 동생에게 준 산딸기는 아무런 댓가없는 사랑이었다. 유난히 차가운 성정을 가진 엄마는 간식 하나도 그냥 주는 법이 없었다. 말을 잘 들었거나, 심부름을 하거나 엄마를 도왔거나, 성적이 좋거나, 상을 받았을때 짧게 한마디 던지는게 다였다.

“다음에도 잘해라.”

칭찬에 인색한 부모님이였다. 다른 아이보다 숫기도 없고 허약해 밖에 나가서 노는 일이 좀처럼 없었던 나는 늘 부모님 눈치보기에 급급했다. 다른 집 큰 딸같은 맏이 노릇을 하기에 모든 게 다 부족했다. 엄마는 야무진 남의 집 딸들과 비교하며 혀를 찼다. 내가 잘하는 거라고는 책을 많이 읽는다던지, 글씨를 잘 쓴다던지, 글짓기대회 나가서 상을 받는 게 전부였다. 그렇지만 그건 살아가는데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성냥이 무서워서 곤로에 밥을 하지 못하는 아이는 엄마에겐 한숨의 대상일 뿐이었다. 잘 할줄 아는게 없으니 늘 눈치를 보며 살았다.

과일이 냉장고에 있어도 한번도 먼저 먹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우리 집 사람들은 내가 어른이 되어 산딸기를 좋아한다고 말했을때 전부 처음 듣는 소리라고 했다. 흔할때는 쳐다도 안보던 걸 비싸지니 먹는다는 타박만 들었다. 그때도 나는 변명처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때도 먹고싶었어. 설탕 버무린 딸기 실컷 먹는 게 소원이라고 일기장에도 썼는데.”

살면서 내가 먹고 싶어서 과일을 사기 시작한 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한다.

아이들이 자라고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5월 30일에 첫 월급을 받았다. 퇴근길에 나는 롯데 백화점으로 갔다. 지하과일코너에서 남아있는 산딸기 3팩을 전부 샀다. 그리고 집에오자마자 저녁도 거른채 산딸기를 혼자 다 먹었다.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내가 번 돈으로 내가 먹고 싶은 산딸기를 배부르게 사 먹을 수 있다는게 너무 행복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산딸기가 아무리 비싸도 산딸기를 사 먹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 징표같아서다. 이제 나를 알고 나와 조금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산딸기 광인이라는 걸 다 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위해 기꺼이 산딸기가 보이면 사다 주기도 하고 보내주기도 한다.

살아보니 알겠더라. 내 사랑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것부터가 시작이다. 야무진 동생은 늘 자기가 원하는것을 정확히 표현하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그리고 자기도 남에게 그렇게 사랑을 표현한다.

아직도 산딸기를 보면 어릴 적 풀죽은 표정의 어린 내가 보인다. 동생이 받던 댓가없는 사랑이 부러워서 나의 산딸기 집착이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산딸기 광인은 제주도에 살면서 요즘 아주 행복하다. 수시로 산책을 빙자한 산딸기 사냥을 나가기 때문이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산딸기덤불에서 엄지손톱보다 큼지막한 잘 익은 산딸기를 딸때면 가시에 손등이 긁혀도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온다. 나를 더 사랑하기 위해 제주도를 선택했던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5월이다. 계절의 여왕은 내게 끝없는 산딸기를 베풀며 나를 사랑해주고 있다.

오늘도 산딸기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고백하며 연신 입으로 산딸기를 집어 넣기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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