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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각 Feb 19. 2021

아티스트가 되는 간단한 방법

내가 뉴욕의 디자인 스쿨에서 배운 것들 – 4화 –

벨기에 출신으로 멕시코에 살고 있는 프란시스 알리스 Francis Alÿs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되고픈 욕심이 있었던 나는 알리스가 부러웠다. 내가 작가가 된다면 이야기하고 싶었던 주제들을 그는 이미 이야기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유명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 작가가 되기도 전에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그가 모두 해버릴 것만 같았다.


“아, 나도 알리스처럼 되고 싶었는데, 부럽다.”


나의 푸념을 들은 한 화가 친구는 특유의 빙글빙글 놀리는 듯 지나가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부러우면 너도 하면 되지!”


당시 나는 디자인 스쿨에 입학한 지 육 개월이 채 되지 않은 풋내기 유학생이었다. 반면 그 친구는 미국의 명문 미대를 졸업하고 뉴욕에서도 여러 번 전시를 했던 촉망받는 작가였다. 그의 말을 그저 자신만만한 젊은 작가의 성의 없는 대꾸 정도로 여겼던 나는 약이 올라 되물었다.


“어떻게?”


“너 핸드폰으로 동영상 찍을 수 있잖아? 너도 알리스처럼 들고 찍으면 되지. 뭐가 어려운데 그래.”


“나는 알리스처럼 유명한 작가도 아니잖아. 내가 작품 만든다고 누가 보는 척이라도 할까.”


“너 그럼 알리스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유명해지고 싶은 거구나.”


“...”




Turista by Francis Alÿs via pablo calderón salazar (“Turista” 푯말 뒤에 서 있는 사람이 프란시스 알리스이다)


그의 말대로 나는 알리스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처럼 유명한 작가가 되어 모마 MoMA에서 단독 전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던 것 같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멋진 꿈이 사실은 그냥 유명해지고 싶다는 지극히 속물적인 욕구였다는 점이 밝혀진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실 그렇게 부끄러울 일은 아니었다.)


나는 ‘작가가 되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 ‘유명한 작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종종 같은 것이라 혼동하면서 살아왔다. ‘알리스 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표현 속에는 그와 같은 스타일의 작품을 만드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의미와 함께 그처럼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혼란스러운 의미의 중첩은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를 기만했고 나 조차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명료하게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디자인 스쿨을 다니면서 점진적으로, 하지만 인상 깊게 배운 것은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을 실제 행위로 전환시키는 방법이었다. 끼와 재능이 반짝거리는 많은 학생들은 자신의 욕망을 행위로 전환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더 영리한 학생들은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정확히 들여다보고 정의를 내린 후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행동 하나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고 종종 그 움직임은 예술적이기까지 했다.


반면 끼와 재능과 영리함 모두 그들에게 뒤졌던 나는 한국에서 받았던 획일화된 공교육을 탓하면서 나의 발현되지 못한 욕망들을 껴안고 괴로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의 딱딱한 공교육 시스템도 어느 정도 내게 영향을 주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욕망을 행위로 전환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내가 유학생활에서 배운 가장 큰 깨달음일지도 모를, 이 귀한 비법을 지금부터 모두와 공유하고자 한다. 유학 오기 전에 이 방법을 알았더라면 나는 유학을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즉 그 욕망을 행위로 전환시키는 방법은 바로...(엣헴), 그냥 하는 것이다! 자... 잠깐, 브라우저의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고 싶더라도 조금 더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겠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막상 듣고 보면 당연한 이야기라 실망감이 클 수도 있다. 하지만 하고 싶으면 그냥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욕망을 현실로 바꾸는 궁극의 방법이자 유일한 방법이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면 글을 쓰고, 래퍼가 되고 싶다면 랩을 하고, 프란시스 알리스가 되고 싶다면 그처럼 동영상을 촬영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자신의 욕망을 행위로 전환시키기에 앞서 먼저 점검할 사안이 있다. 앞서 언급한 나의 경우처럼 자신의 욕망을 혼동하고 있진 않은지 스스로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욕망에 대한 왜곡된 이해는 불필요한 시간과 리소스의 낭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돈, 명예, 지인들의 인정이나 관심처럼 자기표현 이외의 욕망을 충족시키길 원한다면 굳이 창작 활동을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추천하고 싶진 않다. 창작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와중에 돈과 명예 등 부차적인 것들이 따라온다면 다행이지만, 그 부차적인 것들을 위해 창작 활동에 뛰어들면 그 결과가 종종 실망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더 효율적인 방법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과 자기표현이야말로 당신이 가진 궁극의 욕구라면, 축하한다. 당신은 어떤 분야에서든 분명 좋은 작가가 될 것이다. 이제 내가 앞서 알려준 비결대로 창작에 대한 욕망을 당신의 행위로써 충족시킬 일만이 남았다. 이제 구체적으로 그 행위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알아보자.


분야를 막론하고 창작의 욕망을 행위로 전환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는 것, 그중에서도 꾸준히 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꾸준히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조하자면, 매일매일 조금씩, 꾸준히 하는 것이다. 이소룡은 하루에 오백 번 발차기 연습을 하는 상대는 두렵지 않지만 하루에 한 번씩 오백일을 하는 상대는 두렵다고 했다. 마샬 아티스트 martial artist다운 발언이다.


꾸준함을 강조하는 이유는 순전히 작가라는 존재가 갖는 고유한 특성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김영하 작가의 티브이 인터뷰나 BTS의 라이브 무대, 봉준호 감독의 시상식 장면 등을 보면서 작가가 가진 그들만의 천재성, 혹은 그 천재성이 가져다준 화려한 영광에 집중한다. 하지만 작가는 사실 아카데미 시상식의 화려함보다는 매일매일의 꾸준함이 더 어울리는 존재들이다. 김영하 작가와 봉준호 감독은 매일 작품을 구상하며 글을 쓸 테고, BTS는 매일 라이브 무대를 생각하며 연습하고 있을 것이다.


꾸준함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지만 작가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물론 슈가맨 같은 원히트 원더 작가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한 작품이나 하나의 결과물을 통해 평가되지 않는다. 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해온 자신들만의 작품세계를 통해 평가받는다. 스쳐가는 관람객들로서 우리는 작가의 결과물에만 잠시 관심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사실 창작과 예술은 과정의 미학이다.


사람들은 종종 한 작가의 출세작을 보고 그가 한 작품으로 인해 인정받는 작가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정립된다. 다 빈치, 피카소, BTS, 심지어 칸쿤 Cancún의 노점에 앉아있는 이름 없는 작가를 포함해 모든 작가의 작품 세계는 그렇게 느리게 구축된다. 그러니 진지하게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렇게 꾸준히 천천히 가는 수밖에 없다.


꾸준히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하는 줄 몰라서 창작을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 상황에 종종 놓여 있었던 경험자로서 그 답답함을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과 표현을 위해 끙끙거리며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행위 자체가 바로 창작이다. 당신이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끙끙거리며 머리를 싸매고 있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작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시간을 두고 작품 세계가 구축되듯 하나의 개별 작품도 시간을 두고 천천히 구축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당신의 끙끙거림이 작품 제작 시간의 일부임을 이해하는 데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는 사람 가운데 수제 기타를 제작하는 친구가 있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는 육 년 전 여름휴가를 통째로 바쳐 한 수제 기타 장인의 기타 만들기 캠프에 한 달 동안 참가했다. 한 달 뒤 집으로 돌아온 그는 퇴근 후 조금씩 짬을 내어 장인이 가르쳐 준대로 기타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인처럼 공방도 도구도 없었던 그는 옆집의 주차장을 빌려 허접한 공방을 꾸리고 기타 만드는 도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고급 수제 기타를 만드는 도구를 파는 가게는 없었기에 모든 도구는 그 스스로 조달해야 했다. 그는 기타 장인의 공방에서 본 도구들을 기억에 떠올리면서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나무를 깎아 손으로 도구를 만들었다. 기타를 만들기도 전에 기타 만드는 도구를 만드는 일 자체가 하나의 도전이었다.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그가 자신의 첫 기타를 완성하는 데는 무려 오 년의 시간이 걸렸다. 옆에서 보고 있자면 솔직히 답답했다. 기타 하나에 저렇게 하세월이면 언제 기타 장인이 될까 진심으로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첫 기타가 완성되던 날, 뛸듯이 기뻐했다. 그에게는 꾸준히 시간을 들여 기타를 만들겠다는 열정과 확신이 있었다. 첫 번째 기타를 완성한 그는 여세를 몰아 한 달만에 두 번째 기타를 완성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자신의 수제 기타 가운데 한 대를 첫 번째 손님에게 판매하는 감격을 누릴 수 있었다. 그의 기타는 다른 기타 장인들의 작품들처럼 수백만 원에 팔렸다.


그의 첫 번째 기타가 그렇게 비싼 값에 팔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만든 기타 소리가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구 제작 과정을 기록한 사진 등 그가 기타 공방에 쏟은 열정과 시간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자료들도 고객들에게 믿음을 주는 데 큰 몫을 했다. 그는 내러티브 narrative와 그 기록이 창작 활동의 핵심임을 알고 있는 진짜 작가였다.


그런 까닭에 디자인 스쿨을 다니는 동안 교수들은 작품 제작 과정을 최대한 상세하게 기록해 둘 것을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했다. 다큐멘테이션 documentation이라고 불리는 작품의 제작 과정 기록이야말로 작가에게는 작품만큼이나 소중한 결과물이다. 괜히 미술관 한쪽 벽면이 설명글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 매일 판타지 소설을 썼던 사람이 그 결과물로 책을 출판하고 작가로 대박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읽지 않았지만 꾸준히 썼다는 그의 성공담을 읽으면서 그야말로 진정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당신이 어떤 분야에서건 작가가 되고 싶다면 이런저런 실현 가능성을 너무 재지 말고 일단 시작해보길 권한다. 오늘 저녁 집에 가서 딱 삼십 분만 하고 싶은 걸 해 보고, 그 결과물을 자신이 자주 가는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보자. 어쩌면 삼 년 뒤 당신은 전업 작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매일 자신이 한 작업 진행 상황을 기록하는 일도 잊지 말자.


독자들 가운데에는 그냥 하면 된다는 사실을 뭐하러 이리 새삼스럽게 쓴 것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 사람이라면, 축하한다. 당신은 젊은 생각과 마음을 가진 사람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젊음을 영원히 잃지 않고 살길 바라며,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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