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웅 논란이 불편하다.
포털의 메인과 내 타임라인이 한 사람의 30년이 넘은 오래된 그림자를 집중적으로 비추기 시작했다.
지난 과거들이 몇 줄의 기사로 모여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규정하려 한다.
연예인의 오래된 과거를 꺼내 갈라치기로 활용하는 언론싀 기사가 보기 불편해서 스크롤을 빠르게 내려도 누군가의 글들이 다시 보이며, 마음이 어딘가 뻐근해짐을 느낀다.
불편하다.
그 불편함의 중심에는 조진웅보다도 관찰자들의 선택적 분노가 더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은 참 쉽게 분노한다. 그리고 그 분노는 빠르게 응집해 누군가를 완전히 악마로 만들거나 삶을 철저하게 부셔 버린다.
수십년이 지난 과거의 실수는 기사가 되어 증거 영상처럼 반복 재생되고,
긴 세월의 변화는 통 편집되어 잘려 나가버린다. 그렇게 사람은 과거의 한 장면으로 압축되어 유통된다. 한 인간의 긴 인생이 단 한 장면으로 설명되고 있다.
한순간의 잘못과 수십 년간의 태도는 저울의 양쪽 접시에 올라야 한다.
젊음의 잘못은 그 자체로 무겁고, 피해는 결코 가볍지 않다. 동시에 시간의 흐름이 남긴 변화와 갱생의 흔적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나 역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혹시 나도, 개인적 불쾌감이나 호불호의 편린에 기대어 누군가의 인생을 한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지는 않은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추락하는 광경을 보는 것은 묘한 쾌감이 있다. 그 기묘한 쾌감은 어떤 방식으로든 내 안에 자리한, 타인의 균열을 통해 내 위치를 확인하려는 아주 오래된 피해의식처럼 보인다.
누군가가 무너질 때 내가 안도하는 이유는, 내가 완벽하지 않음을 외면하는 대신, 그 사람의 불완전함에 위안을 얻는 것은 아닐까?
언론의 선택적 기소와 누군가를 무너트리는 쾌감에 중독된 대중의 폭발적 소비 습관, 그리고 기억이 정치적으로 배열되는 이 기묘한 구조.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설계한 분노의 흐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렇게 어떤 사건은 크게 부풀려져 공론장이 되고, 어떤 사건은 이 논란에 묻혀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사라진다.
도대체 그 여론재판에 기소를 하는 기준이 공정하지 않다.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분노를 쏟아붓는 방식이 선택적이고 왜곡되어 있으면, 정작 지금 시대에 규명되어야 할 정의는 불균형해지고 가려진다.
물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잊지 않아야 한다. 책임은 분명히 따져져야 하고, 피해는 온전히 응답받아야 한다. 그러나 피해자도 아니고,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는 관찰자들의 전지적 폭로를 도대체 어찌봐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그 응답이 ‘한 인간의 사회적 매장’의 형식으로만 이루어진다면, 그건 또 다른 폭력이다. 그것도 개인에게 쏟아내는 사회적 폭력.
그래서 이중적이다.
그리고 몹시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