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건 예쁘게 전시된 신상품이 되는 과정과 닮아 있다. 그리고 내가 사회생활을 하는 공간은 상품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진열대 같다. 조그마한 결함이 드러날까 봐 두려움에 떠는 곳. 우리는 흔히 ‘사회, 타자, 규범’이 완벽한 기준을 가지고 우리를 심판한다고 믿는다. 평가의 시선은 대상을 물화한다. 상대의 결함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순간, 상대는 고유한 인격체에서 고쳐야 할 기계로 전락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완벽한 이미지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나는 출근하기 전, 거울 앞에서 내 안의 초라함과 무능함, 혹은 정체 모를 불안들을 꼼꼼히 가리는 데 익숙해졌다. 명상을 통해 남들에게 보여줄 매끄러운 표정과 정돈된 언어들로 나를 덧칠한다. 그것이 나를 안전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다. 실수를 하더라도, 그리하여 타인이 나의 결함을 지적하더라도, 애써 태연한 척할 것. 혹여라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타인이 나의 부분을 즐기더라도, 끝내 미학적 불쾌감을 노출하지 말 것.
유난히 그 덧칠이 무겁게 느껴지던 날이 있었다. 카페에는 손님들이 북적였고, 나는 주문을 받고 있었다. 한 번의 실수를 시작으로 연이어 해야 할 일들을 놓쳤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고, 몇몇의 손님은 나의 결함을 정확히 짚어내려는 듯 얼굴을 한껏 구기며 짜증 섞인 말투로 나를 대했다. 숨기고 싶었던 감정의 바닥이 타인 앞에 고스란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곧이어 날아올 날카로운 지적이나, 나를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찍을 차가운 시선을 기다렸다. 그리고 편집증적 망상이 사람들의 몸짓과 말투에서 수많은 비난의 문장을 뽑아내어 내 목구멍에 쑤셔 넣었다. 시야가 일그러지고 발밑의 감각마저 희미해졌다. 온몸은 지지대를 잃은 채 고장 난 기계처럼 덜컹거리며 떨렸다. 뒤이어 단단히 채워진 셔츠 단추를 모두 뜯어내고 싶을 만큼 답답함을 느꼈다. 불안이 나를 집어삼키기 직전, 나는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비겁하게 휴식을 요청했다. 그리고 휴식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내가 지키려던 매끄러운 가면을 진열대 위에 내팽개친 채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들켜버린 그 못난 구석을 보고도 놀라거나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진열대에 흠집이 난 상품으로 남아도 좋다는 듯 나를 대하는 사람들. 그들은 내 결함을 보고 평가하거나 교정하려 들지 않고, 나를 그저 하나의 풍경처럼 받아들여 주었다. 마치 아스팔트 도로 위에 흩어진 낙엽을 보듯, 특별할 것도 잘못될 것도 없다는 그 안온한 시선 속에서 나는 비로소 평온해졌다.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고 가벼워진 몸을 만끽했다. 비난받지 않는 나의 결함은 더 이상 나를 짓누르는 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결함 덕분에 나는 완벽을 연기하던 배역을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이 무대에서 추방당하지도 않았다. 각자의 구멍을 가진 채 배역 없는 내 옆에 기꺼이 서준 사람들 덕분에, 나는 ‘배역 없는 배역’으로서 이 무대를 누빌 수 있게 되었다.
결여된 주체와 결여된 타자가 만나는 지점. 결여를 수용하는 태도는 “나도 너처럼 구멍 난 존재다”라는 무언의 고백이다. 이때 주체는 깨닫는다. 나를 심판할 ‘사회, 타자, 규범’조차 완벽한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체에게 난 흠집은 숨겨야 할 치부가 아니라, 그 물건이 가진 고유한 서사이자 문양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결함을 감싸주는 행동은 결함을 덮어주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결함이 상대에게 어떤 궤적을 그리며 만들어졌는지 그 맥락을 긍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대개 완벽한 상태를 아름답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 완벽의 관념은 주체의 생동감을 잔인하게 도려낸다. 자신과 타인에게 ‘완벽해야 한다’는 가혹한 척도를 들이대는 것은 우아한 폭력일 뿐이다. 본래 언어란 불완전한 것이기에, 애초에 우리는 완벽이 무엇인지 정의할 도리조차 없다. 우리를 온전히 수식할 수 있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불완전함 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완전해질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상대방의 결함을 들추지 않고 나의 불완전함을 먼저 내보이는 배려 속에는, 타인에게 발가벗겨질 때의 미학적 불쾌감을 압도하는 행복이 있다. 그것은 매끄러운 완벽함이 흉내 낼 수 없는, 비대칭적 조화가 선사하는 미학적 쾌감이다. 우리가 서로의 결여를 메우려 하기보다 그 틈 사이로 흐르는 온기를 긍정할 때, 우리의 삶은 진열대의 신상품보다 훨씬 더 깊고 풍부한 질감을 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