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아이가 듣는 우리동네 전설 : 예천·안동 편1> 양궁선수 김진호
“첫째야. 올림픽이 뭐야?”
“전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겨루는 대회.”
“그렇지. 그중 제일 잘하는 사람이 금메달을 따겠지. 금메달 따는 게 어려울까, 쉬울까.”
“무지 어렵겠지.”
“우리나라가 언제 올림픽에서 처음 금메달을 땄을까.”
“그건 너무 어려운데. 우리나라는 엄청 옛날부터 땄을 것 같은데.”
대한민국 선수단이 올림픽에 출전한 건 1948년이 처음이다. 선수단은 동메달 2개를 땄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에 한국은 꾸준히 출전했지만 금메달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정신력만으로 금메달을 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올림픽에 출전한 지 28년이 지난 1976년 첫 금메달이 나왔다. 레슬링에 출전한 양정모였다. 그에겐 “건국 후 첫 금메달” “민족의 숙원 이룩”과 같은 찬사가 쏟아졌다.
그 시기 경상북도의 조용한 동네 예천에선 위대한 씨앗이 뿌려졌다. 1973년 예천여중과 예천여고에 양궁부가 만들어진 것. 대한민국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거기 어디?”라고 하기 쉬운 예천에서 양궁부가 만들어진 건 딱히 주목받을 일이 아니었다.
1961년에 태어난 김진호는 갓 뿌리를 내린 예천여중 양궁부에 들어갔다. 발레리나가 꿈이었던 김진호는 예천여고 양궁부 선수였던 언니 숙길의 권유로 활을 손에 쥐게 된다. 164cm에 몸무게 50kg이 안되던 김진호는 왜소한 체격이었다. 강한 힘이 필요한 양궁은 왜소한 김진호에게 버거운 운동이었다. 양궁을 배우는 동안 김진호는 코피를 자주 흘렸다.
힘든 운동이었지만 김진호는 활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왜소한 체격은 약점처럼 보였지만 보통사람보다 긴 손가락은 시위를 놓을 때 확실히 유리했다. 예천에서 유명한 사냥꾼이었던 할아버지의 피도 김진호의 몸속에 남아 있었다.
양궁을 배운 지 2년쯤 된 1977년 김진호는 제대로 사고를 친다. 전국체전 양궁 개인전 우승을 차지한 건. 예천여고 1학년 때였다. 양궁계에 혜성이 등장했다. 이제 김진호는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한다. 한국 1위를 넘어선 그 무엇. 1978년 9월 기록평가전에서 김진호는 비공인 세계신을 작성한다. 김진호가 큰 사고를 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자라기 시작한다.
1978년 10월 한국 여자양궁팀이 일본 전지훈련을 떠났다. 예천여고생 황숙주, 김진호와 인천시청 소속 오영숙 3인방이 팀원이었다. 이 중 김진호가 막내였고, 경력은 3년으로 가장 짧았다. 활을 잡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상승곡선은 무서웠다. 한일친선경기에서 김진호는 3791점으로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세운다. 공인 세계 신기록은 3741점이었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실전이다. 1978년 12월 열린 방콕아시안게임이 무서운 신예의 솜씨를 볼 무대였다. 아시안게임에서 양궁은 방콕대회가 첫 정식종목 채택이었다. 우승후보는 북한, 중국(당시는 중공), 일본이었다. 북한은 뮌헨, 몬트리올 올림픽에 줄곧 출전한 데다, 항상 메달권 성적을 기록한 강자였다. 한국팀은 아직 국제무대에 성적표를 내밀지 못한 풋내기일 뿐이었다. 164cm에 몸무게 48kg인 김진호는 체격에 맞게 가벼운 활을 사용했다. 바람 영향을 많이 받아 위험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12월 15일 북한 김향민이 601점으로 앞서나갔다. 뒤를 일본 고또가 이었고, 김진호는 598점으로 3위였다. 황숙주는 593점으로 4위. 팽팽했다. 다음날 금은동메달이 결정됐다. 양궁개인종합 금메달은 김진호의 목에 걸렸다. 역전승이었다. 김진호는 “개인기록보다 (성적이) 훨씬 못해 아쉽다”면서 담대한 면모를 보였다. 여자단체는 은메달이었다. 기대 이상 좋은 성적이었다.
대한민국이 김진호의 금메달에 환호했다. 10평 함석집에 살던 아버지 김종국이 부랴부랴 서울 MBC를 찾았다. 전화기가 있는 집보다 없는 집이 훨씬 많은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MBC 사옥에서 국제전화로 딸과 통화했다. 금메달 소식이 전해진 예천여고 학교 교실 칠판엔 전부 ‘김진호 만세’라는 글자가 쓰였다. 김진호 집에는 일가친척 30여 명과 동네주민들이 모여 밤새도록 무용담을 나누었다.
1979년 1월 15일 제16회 한국신인체육상 시상식엔 3명이 무대에 올랐다. 배구의 장윤창, 사이클의 박일우, 그리고 양궁의 김진호였다. 그 해엔 더 큰 대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였다. 아시안게임이 아시아 최강자를 가리는 대회라면 세계선수권은 전 세계 최고를 가리는 대회였다. 수준이 달랐다. 아시아에서 통한 김진호의 활이 과연 세계에서도 통할지 대한민국 국민들은 궁금했다.
김진호는 기대를 뛰어넘었다. 영웅의 등장이었다. 여자 60m 더블라운드에서 643점을 쏘며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30m, 50m, 개인종합, 단체전 금메달도 김진호의 몫이었다. 6개 부문 중 5개 부문 우승. 완벽하면서 압도적인 경기였다. 대한민국 역사상 기록경기 부문에서 최초 금메달이었다. 한국인으로선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에 이어 두 번째. 하필 김진호가 금메달을 딴 곳도 베를린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대사건이었다.
이 흥분을 언론들은 국민과 나누고 싶었다. 동아일보가 김진호와 국제통화를 했다. 김진호는 “너무 기뻐 말이 안 나온다”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43년 전 손기정 선생님이 일본기를 달고 월계관을 받은 그 장소에서 제가 금메달을 받았다는 게 꿈만 같고 보람이 더 큰 것 같다”면서 손기정을 떠올린다. 아마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도 똑같은 상상을 했으리라. 김진호는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땐 머리끝이 서는 것 같았다”라고 표현한다. 대한민국 국민들 머리끝도 마찬가지로 서지 않았을까 싶다.
김진호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예천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예천이 어느 곳이길래 갑자기 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천재궁사가 나타난 것일까. 동아일보는 예천이 예로부터 활의 고장이었음을 전한다.
세계선수권이 끝나자 김진호는 예천의 딸에서 대한민국의 딸이 돼 있었다. 1979년 7월 25일 김포공항에서 한국궁도선수단 환영식이 크게 열린다. 덩달아 아버지도 큰 선물을 받았다. 아버지는 대한생명보험회사에서 사원으로 근무 중이었다. 회사는 아버지에게 금일봉을 전달하고, 예천지소장으로 승진 발령한다. 김진호와 그의 가족들은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하다고 다들 생각했다.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대회 제패. 이제 남은 건 단 하나였다. 국민 누구나 알았다. 바로 이듬해 열리는 모스크바 올림픽. 그 대회를 제패하면 명실상부한 세계 챔피언이었다. 만약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다면 그건 김진호이고, 김진호는 무조건 금메달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컨디션은 좋았다. 1979년 9월 27일 모스크바 올림픽파견 대표선수 2차선발 평가전 2일째 50m 싱글에서 종합 1위를 차지했다. 이틀 뒤 여자 50m 더블에서도 1위. 세계기록을 35점이나 앞서는 기록이었다. 다가올 올림픽에서 가장 높은 시상대에 서는 건 김진호일 거라고 다들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80년 새해가 밝았다. 경향신문 보도는 전 국민들이 김진호에게 거는 기대를 잘 보여줬다.
"올림픽의 해를 맞아 우리 스포츠계가 19세의 이 천재 궁도소녀에게 거는 기대는 거의 신앙에 가까울 정도이다. 현재의 기록으로 보아 모스크바올림픽에서 가장 유망한 금메달 획득 종목은 궁도 하나뿐이기 때문이다.”(경향, 1980.1.21.)
김진호는 어깨가 무거웠다. 자신감도 그만큼 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먹구름이 끼기 시작해다. 1979년 12월 27일 소련 특수부대와 KGB 요원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하피줄라 아민 대통령 제거 작전을 벌인다. 최근 미국이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벌인 작전의 원조격인 셈이다. 이 작전으로 아민 대통령은 사망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지미 카터였다. ‘평화 지킴이’를 자처하는 인물이었다. 소련의 군사행동을 응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이라는 카드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한국도 사정은 암담했다.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가 군사반란을 일으키면서 대한민국이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황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1980년 들어서면서 시민과 학생들이 신군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한다. 올림픽을 논하는 건 그다음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김진호는 활을 놓지 않았다. 1980년 4월 24일 60m 싱글에서 336점을 쏜다. 소련의 코프반 발렌티나가 세운 세계기록보다 2점이나 높았다. 그날 미 올림픽위원회(USOC) 대의원 총회가 열린다. 올림픽 불참을 선언했다.
열흘 뒤인 24일 외무부는 대한올림픽위원회(KOC)에 불참을 권고했다. 말이 권고였지, 내용상 통보였다.
1980년 5월 17일 24시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정치활동이 전부 금지되고, 언론과 출판, 보도, 방송은 모두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직장에서 벗어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금지였다. 같은 날 대한올림픽 위원회(KOC)는 긴급총회를 열었고 올림픽 불참을 선언했다.
몇 달 뒤 열린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양궁 여자개인 금메달은 소련의 케티반 로사베리제였다. 순식간에 날아올라 가장 강력한 화살을 쏘았던 김진호의 활은 단 한 발도 쏘지 못한 채 쓸쓸히 내려놓아야 했다.
4년이 지났고 1984년이 됐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김진호를 잊지 않았다. 김진호에 대한 믿음은 그 사이 더 강해졌다. 겁 없던 어린 궁사는 이제 생각이 많아졌다. 부담은 어깨를 짓눌렀다. 0점을 두 번이나 기록했다. 0점을 기록하고 다시 활을 잡는다는 건 가능한 일이 아니다. 0점 과목을 갖고서 서울대에 들어가겠다는 꿈을 꾸는 것과 다를 바가 뭘까.
금메달은 17살 서향순이 받았다. 몇 년 전 김진호처럼 겁 없는 신예였다. 0점을 두 번이나 맞힌 김진호는 동메달을 땄다. 기적과 같은 메달이었다. 시상대에 선 김진호는 서향순에게 “향순아 고맙다. 니가 금메달을 따줘서 언니가 욕을 덜 먹는다”며 울먹였다. 운명은 김진호의 올림픽 금메달을 비껴갔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김진호는 다시 경기장에 나선다. 이젠 노장선수였다. 마지막 불꽃이었다. 무대에 나서준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었다. 김진호는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한다. 여자 30m, 60m와 단체전 금메달. 3관왕이었다. 에이스로서 시작한 김진호는 에이스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2018년 대한민국 스포츠영웅 명예의 전당에 김진호가 이름을 올린다. 2024년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단 17명만 뽑힌 귀한 자리다. 김진호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손기정, 김연아, 차범근, 엄홍길, 이봉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 됐다.
김진호 이후 예천은 국가대표의 산실이 됐다. 금메달을 딴 선수도 여럿 나왔다. 대한민국 양궁의 본거지란 별칭이 생겼다. 그 앞자리엔 김진호란 이름이 또렷이 빛난다.
"첫째야 이제 알겠니? 우리 동네 예천엔 금메달처럼 빛나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반짝이는 전설이 살고 있단다."
♣ 다음엔 어떤 전설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다음엔 안동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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