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김여정 부부장이 담화를 발표하면 가급적 원문을 구해봅니다. 북한의 진의를 좀더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이지만 한편으론 읽는 맛이 쏠쏠한 이유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욕설 때문에 불편했는데 이제는 욕설은 돼지꼬리로 날리고 능청스러운 말투의 행간을 보게 됩니다. 남쪽의 독자로서 북의 담화 작가 선생들에게 바람은 욕설은 가급적 자제하며 담화의 격을 높이기 위해 분투해 달라는 것입니다.
8월1일 발표한 담화도 흥미로왔습니다. 담화의 목적은 남북 통신연락선 복원 합의도 됐으니 8월의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제 눈 길을 사로잡은 것은 그 보다는 다른 지점이었습니다. 7.27 남북 통신연락선 복원 합의에 대해 별로 길지도 않은 담화문 내에서 상반된 평가를 하고 있는 점입니다.
담화문의 앞 2/3는 7.27 합의를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즉 ‘단절되였던 것을 물리적으로 다시 련결시켜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남조선 안팎에서 북남수뇌회담문제까지 여론화하는 것은 때이른 경솔한 판단’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뒷부분에서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뒷부분은 주로 한미 합동 군사연습이 통신선 복원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는 소리에 불편한 심경을 토로하는 내용인데 그러다 보니 7.27 합의의 의미가 자신도 모르게 격상됩니다. ‘단절됐던 것을 물리적으로 련결시켜 놓은 것에 지나지 않다’더니 ‘지금과 같은 중요한 반전의 시기에’라고 하질 않나 ‘신뢰회복의 걸음을 다시 떼기 바라는 북남수뇌들의 의지를 심히 훼손시키는’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한미 훈련 중단의 당위성을 역설합니다.
사실 통신선 연결이 단순한 물리적 연결에 그치는 거였다면 그것을 계기로 한미 훈련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지요. 비례의 원칙에 맞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북의 내심은 통신선 연결에 대해 ‘반전의 시기’ 내지 ‘신뢰회복의 걸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남쪽이 기대하는 것처럼 남북 정상회담으로 자동으로 확대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겠지요.
담화문의 이 구절을 보면 북이 진짜 남쪽의 확대해석을 우려하는 것 같습니다.
“북남수뇌들이 직접 두손을 맞잡고 공동선언과 같은 사변적인 합의를 만들어 발표한 후에도 북남관계가 바라지 않던 곡절과 파동을 겪고 위기에로 치달았던 지난 3년간의 과정을 돌이켜본다면 내가 오늘 말하는 견해가 십분 리해될것이다.”
그렇다면 한미 훈련의 중단 여부는 통신선연결이 남북관계의 확대로 이어지는 데 얼마만한 작용을 할까요. 사실 김여정이 담화를 발표하기 전에는 한미 당국 사이에 코로나나 남북관계 진전 여부를 검토하며 유연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담화가 나온 후 야당의 '김여정 하명 프레임' 때문에라도 중단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이런 식의 사태 전개에 대해 북이 예측을 못했을까요. 한 두 번도 아닌데 못했다면 바보지요.
이번 김여정 담화는 지난 3월에 한미훈련 중단을 요구했던 담화와 달리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주민들이 접하는 매체에는 싣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북한 당국이 체면이나 위신 때문에라도 꼭 관철하기위해 노력해야 하는 부담은 피했다는 것이지요. 차후 협상력을 높이기 잽을 던져본 것이지 체중을 싣지는 않았다는 뜻이지요.
한미훈련 보다 더 시급한 일들이 북한에 지금 넘쳐 납니다.
그동안 한미를 외면하고 오로지 중국만을 바라보던 북한이 이번에 한미에도 눈길을 주고 악수를 할 수도 있다는 제스쳐까지는 취했습니다. 그러나 가던 길을 계속 갈지, 아니면 '반전의 시기'가 될지는 한미와 중국, 그리고 무엇보다 당사자인 북한의 플레이에 달렸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