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전원회의와 극초음속미사일 -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 관련한 지난번 페북 글을 올리고 당분간은 지켜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각 보다 정세가 일찍 꼬여 다시 펜을 잡게 됐습니다.
12월29일자 정의용 외교부 장관 발언의 맥락
지난번 글을 쓰고 좀 지켜보려했다고 얖에서 얘기 했는데 사실 당시에도 좀 찝찝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글을 올린 당일인 12월29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내신 기자 브리핑에서 베이징 동계 올림픽 관련해 기자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을 했지요. 즉 "베이징올림픽을 남북관계 개선의 하나의 계기로 삼기로 희망했는데, 현재로서는 그런 기대가 사실상 어려워지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다"라는 것이었지요.
정 장관의 이 발언이 있은 12월29일은 12월27일부터 시작된 북한의 당 전원회의가 3일째 되는 날이었지요. 이틀만 지나면 북한이 당 전원회의를 총결하고 대남 대미관계에서 모종의 메시지를 발표할 것으로 예상됐지요. 그런 시점에 정 장관이 저런 얘기를 했다는 것은 단순히 기자가 물어보니 답한다는 차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이징 '올림픽을 무대로 한 남북관계'는 어려우니 전원회의 총결시 참고하라고 북측에 남쪽의 입장을 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지요.
사실 좀 불길했습니다. 지난번 글에서 제가 언급한 북한의 '종전선언 활용 구상'에는 분명 베이징 올림픽을 무대로 한 부분이 비중있게 들어 있었을 터인데 바로 그 부분을 직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베이징올림픽을 무대로 한 4개국 종전선언은 지난해 12월16일 미국이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을 공식화하면서 사실상 무산된 상황이었지요. 정장관도 위의 발언에서 종전선언이라고는 말을 하지 않았지요.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종전선언 말고라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총비서가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나란히 참석하고, 나아가서는 시진핑 주석과 함께 남북중 3자 정상회담을 하는 그런 그림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정장관은 바로 그런 그림에 대해 우리 정부가 응할 수 없게 됐다는 뜻을 밝힌 셈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북한 전원회의가 진행 중인 와중에 미리 발표함으로서 혹시라도 김정은 총비서가 전원회의를 총결하면서 우리 측에 그런 제의를 하지 못하도록 미리 선수를 친 셈이지요. 만약 북한이 진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정장관 발언이 그런 생각을 깨는 결정타가 됐겠지요.
솔직히 지난 29일 글을 쓸 때만 해도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속으로야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겠지만 누가 봐도 의도가 뻔하고 남쪽을 골탕 먹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그런 제안을 과연 하겠는가, 우리 쪽에서 노파심으로 미리 쐐기를 박은 게 아닐까 싶었던 거지요.
예상보다 컸던 북한의 반발, 무엇을 뜻하나
그런데 생각 보다 북한의 반응이 격렬하더군요. 북한이 12월31일 당 전원회의를 마치고도 대남 메시지가 없는 것을 보고 직감했습니다. '베이징올림픽 기간 남북 관계 개선'이 어렵다던 정장관 발언이 정곡을 찔렀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뒤집어 생각하면 북한이 전원회의 총결 후 발표할 대남 메시지에 그런 내용을 상정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정상적인 국가관계라면 상대방을 곤란하게 할 제안은 사전의 외교 접촉을 통해 거르는 게 상식일 텐데 사전 접촉이 있었다면 그 과정에서 걸러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북한이 그런 제안을 강행할 의사가 감지되자 외교장관이 직접 우리 입장을 미리 피력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1990년대 초부터 약 20년간 김정일 시대를 취재하면서 당시 북한의 당대 키워드는 '산업 재건'이라고 생각한 바 있습니다. 바로 '80년대말 90년대 초 소련 동유럽 붕괴 당시 무너진 산업 재건'을 말합니다. 당시 북한의 모든 대외 활동은 바로 여기에 포커스를 둔 것이었습니다. 김정은 시대 초기까지도 마찬가지였다고 봅니다.
그러다 2017년 일련의 핵미사일 시험으로 인한 유엔제재 이후 몇년간 '유엔제재의 완화 내지 무력화'가 키위드가 됩니다. 모든 초점이 거기에 맞춰졌지요. 2018년의 4.27판문점 회담, 6.12 싱가폴 회담, 9.19 공동성명 등에서 겉치레의 화려한 말들을 걷어내고 보면 결국 귀결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지요.
하노이 회담 실패와 코로나로 인한 국경 봉쇄 이후로는 입지가 더욱 좁아졌습니다. 당장 필요한 '식량.생필품.의약품의 대규모 지원 및 보급'이 북한이라는 국가의 대외 활동의 초점이 됩니다. 옛 빨치산의 보급투쟁을 연상케하는 '국가 단위의 보급투쟁'인 셈입니다.
북한이 그동안 '가상의' 물주인 중국을 상대로 어떻게 보급투쟁을 전개해왔는지는 지난번 글에서 장구하게 기술했으니 생략합니다. '가상의'라는 말을 앞에 붙인 것은 중국이 북한이 기대하는 만큼 제대로 물주 노릇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최근 뿐 아니라 지난 30년간 그랬습니다. 북한이 살려면 중국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누누이 주장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눈앞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중국인 것도 사실이니 '무력도발과 중국의 보상 모델'이 대만 문제를 앞세운 미국의 압박 때문에 더이상 작동하기 어렵게 된 마당에 문 대통령이 주장한 종전선언이 나름의 쓸만한 루트로 떠올랐다는 것은 지난번 언급했습니다.
종전선언과 관련해 북한이 상정한 미래의 물자보급 창구는 크게 두 군데였을 것입니다. 첫번째가 중국이고 두번째가 한국이지요. 중국은 베이징 올림픽이 걸려있고 한국은 3월 대선이 걸려 있습니다.
2월의 베이징올림픽은 3연임 내지 영구집권을 추진 중인 시진핑 주석 입장에서는 반드시 성공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그 성과를 바탕으로 가을의 20차 당대회에서 3연임을 밀어붙일 수가 있지요. 그런데 미국과 서방국가들의 외교적 보이콧과 코로나 변종인 오미크론의 창궐 등으로 만신창이가 돼 가고 있습니다.
뭔가 반전을 가져올 계기가 필요한데 베이징 올림픽을 무대로 한 4자 종전선언은 무산됐어도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남북이 만나는 그림은 남아 있습니다. 지난해 중국 전문가들이 "서울에서 기차 타고 평양 거쳐 북경에 오는 그림이 가장 멋진 그림"이라고 떠들고 다녔다고 하더군요. 여기에 시진핑 주석 중재 하에 남북 정상이 만나는 그림이 더해진다면 국제적인 제전으로서 금상첨화겠지요.
그리고 이런 그림을 성사시킨 북한에 대해 중국은 당연히 보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문 대통령이 만약 그런 이벤트에 참여할 경우 자칫 잘못하면 지난 2015년 9월 중국의 전승기념일에 서방 지도자중 유일하게 천안문 망루에 올랐다가 외교적으로 낭패를 겪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같은 처지에 몰릴 수도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극초음속 미사일 사정거리 700km의 비밀
.당 전원회의 이후 북한이 보인 반응이 정의용 장관의 베이징올림픽 관련 메시지에 기인한 것이라는 심증을 더욱 굳게 한 것이 바로 1월5일의 극초음속미사일 발사입니다. <조선중앙통신>은 1월6일 “국방과학원은 1월 5일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발사를 진행했다”며 “미사일은 발사 후 분리되어 극초음속 활공비행전투부의 비행구간에서 초기발사방위각으로부터 목표방위각에로 120㎞를 측면 기동하여 700㎞에 설정된 표적을 오차 없이 명중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700km라는 수자가 왜 등장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북한이 미사일을 동해안에서 발사한다고 할 때 원산을 기점으로 상정하는데 원산 기점 700km 지점에는 바로 미 7함대가 주둔하는 일본 나가사키현의 사세보 해군기지가 있습니다. 원산에서 사세보까지 거리가 694km이니 사정거리 700km라고 하면 군사전문가라면 쉽게 떠올릴 곳이 바로 사세보 해군기지입니다.
현재 일본 내 미 해군 기지는 동쪽에 요코스카, 서쪽에 사세보 그리고 남쪽에 오키나와 등이 대표적인 주둔지입니다. 그 중 사세보야 말로 한반도를 향해 있는 주일 미 해군의 중추기지라고 할 수 있지요. 사세보는 메이지유신 때인1870년대부터 일본의 아시아 침략 전초기지였고 1945년부터 미해군이 주둔한 이래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의 물자보급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7함대가 보유하고 있는 70여척의 함정을 비롯해 3개월간 운영할 수 있는 85만 KL의 연료와 4만t의 탄약이 저장돼 있다고.합니다. 한마디로 서태평양 상 미 해군의 탄약과 연료의 보급 중심지인 셈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한미 연합 정보자산의 추적에 의하면 1월5일 북한이 발사한 극초음속미사일의 사거리가 700km에 못미쳤다는 점입니다. 일본 측 추정에 의하면 500km였다고 합니다. 즉 700km라는 수자는 실제 미사일의 도달거리를 뜻하는 게 아니고 북한 당국의 머리 속에 있는 목표지점이었던 셈이지요. 즉 이번에 발사한 극초음속미사일이 사실상 겨냥한 곳이 바로 사세보항이라는 점을 미국 측에게 숫자로 고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극초음속미사일이 각광을 받는 것은 기존의 방공체계로는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 서태평 해군의 3개월치 탄약과 연료,그리고 70여대의 7함대 함정이 북한 미사일 위협에 그대로 노출돼있다는 얘기가 되니 미국 측이 시껍할 얘기지요.
그런데 정의용 장관 발언이 원인을 제공했는데 왜 갑자기 사세보 해군기지가 타겟이 됐을까요? 정장관이 발언한 방식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베이징올림픽을 남북관계 개선의 하나의 계기로 삼기를 희망했는데 현재로서는 그런 기대가 사실상 어려워지고 있다"라고 한 표현을 보면 누가 봐도 한국 정부의 희망과 달리 여건 때문에 못하게 된 것으로 이해하기 좋게 돼있지요. 외교관의 완곡어법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어쨌든 우리 정부에게 책임을 묻기가 쉽지 않은 어법입니다. 또한 미국이 12월16일 베이징올림픽을 외교적 보이콧 하기로 공식화한 이후 분위기가 경색된 것도 사실이니 북한이 경고의 대상을 미국으로 상정한 것도 납득할만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국이나 미국 정부를 드러내놓고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도 특기할만한 일입니다. 다만 숫자로서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상대가 알아듣고 합당한 태도를 취해주기를 바란 것으로 보입니다. 즉 종전선언과 관련하여 앞으로 미국이 한국에 압력을 넣어 무산시키는 일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이겠지요
이것은 곧 미국 국무부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봅니다. 종전선언과 관련해 미 국무부는 북미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는 듯 합니다. 다만 국방부 등 군 관계자들은 노골적으로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미군은 대만해협과 우크라이나라는 두개의 세계적인 전선에 대처해야 합니다. 북한까지 군사적으로 대처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 입장에서도 베이징 올림픽이라는 한번의 기회는 무산됐지만 2022년 3월 남한 대선을 앞둔 메인 무대는 남아있습니다. 지난 2018년 평창을 무대로 펼쳐졌던 남북, 남북미, 그리고 그에 연동됐던 중국의 다급한 물밑 움직임 등의 지정학적 게임이 재현될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일단 고강도 압박 카드를 꺼낸 북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