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정상 공동성명>에 여러 쟁점이 있지만 그중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 재도입을 내용으로 하는 앞부분을 유심히 살펴봤습니다. 이 부분은 윤 대통령이 후보시절 북한의 핵미사일 모라토리움 파기에 맞서 내세웠던 공약 사항이었지요. 재도입이란 박근혜 정부에 의해 도입돼 2018년 초까지 운영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뒤는 문재인-트럼프 시절 남북미 대화가 본격화되면서 흐지부지된 바 있지요.
그래서 사실 구면이기 때문에 이번에 합의된 내용을 그 이전과 비교해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선 간단히 용어 설명이 필요할 듯 하네요. '확장억제'라는 말, 많이 쓰이는데 그 뜻은 이렇습니다. '미국의 동맹국이 적대국의 핵공격 위협을 받는 경우 미국이 핵우산, 미사일방어체계, 재래식무기를 동원해 미 본토와 같은 수준의 억제력을 제공'한다는 의미입니다. 간혹 이번 정상회담 기사를 보다보면 미국이 북한 핵에 맞서 핵까지 동원해 확장억제를 하겠다는 의지를 처음으로 내비췄다는 등의 내용이 보이는데 확장억제라는 말 안에 핵우산을 사용한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새로이 감격할 얘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동안 한미간 군 관련 성명이나 정상회담 합의문에는 이렇게 풀어쓰지 않아서 그렇지 미국이 확장억제를 제공한다는 얘기가 빠짐없이 들어가 있지요.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란 확장억제를 어떻게 제공할지에 대해 협의하는 고의급형의체를 뜻합니다. 2016년 10월 출범 당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운용하는 협의 메카니즘을 참고로 했다는군요. 나토 회원국 중 핵을 보유하지 않은 회원국들도 확장억제 이행방안 협의에 참여케 하는 '핵기획그룹(NPG)'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모델로 했다고 합니다.
미국이 확장억제전략협의체를 운영하는 이유 중에는 미국의 동맹국 중 미국의 핵우산을 불신해 전술핵 배치나 핵공유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해 선을 긋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미국 핵우산의 신뢰성을 높이고 믿게 하기 위한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미국의 확장억제 의지가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것은 미 전략자산(B-52, B-1B,B-2폭격기, 항공모함, 핵잠수함, F-22,F-35스텔스 전투기)의 전개나 배치를 통해서인만큼 2016년부터 있었던 EDSCG의 한미간 논의 역시 전략자산 배치를 어떤 방식으로 할 건가를 둘러싸고 전개됩니다. 우리 국방당국은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에 대한 억지를 위해 조금이라도 미국 전략자산을 한반도 인근에 붙들어 두려 하고, 미국은 비용 부담 등의 이유로 난색을 표하는 등의 줄다리기가 계속돼 왔습니다.
외교가에서는 우리 국방부가 2016년 10월 SCM(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호기롭게 미 전략자산의 상시순환배치('상시배치 및 전개'를 요구했다고도 함)를 요구했다가 미측에 보기좋게 까인 것을 꽤 충격적인 사건으로 평가하는 듯 합니다. 상시순환배치란 미 전략자산이 공백없이 연달아 한반도 일대에 들어와 사실상의 주둔효과를 보게하는 상태인데 당시 미국측은 비용 문제와 함께 그럴 경우 별도의 부대가 한국에 주둔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들어 난색을 표했다지요. 그래서 두달 후 열린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에서 서로 합의한 게 '미 전략자산의 정례배치'였다고 합니다. 정례배치란 미 전략 자산을 '지속적 수시로 투입한다'는 뜻이라는군요. 우리 국방당국자들이 "지내놓고 보니 우리기 도달할 수 있는 최고수준의 합의였던 것 같다"고 한답니다. 그 1년 후에는 그 보다 훨씬 낮은 단계인 '순환배치'에 합의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다시 용어 정리를 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배치란 미 전략자산이 한반도에 와서 일정기간 주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긴 왔는데 하루 이틀 있다가 가버리거나 상공을 한바뀌 쓱 훓고 돌아가는 것은 배치가 아니라 전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순환배치란 말은 참 애매하지요. 일정 기간을 계속 주둔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상시순환배치인데 그것이 아닌 순환배치는 사실상 잠깐 다녀가는 전개까지도 포함해서 그야말로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라는 것이지요.
저 역시 이런 디테일한 표현의 차이까지는 눈여겨 보질 못했었는데 이번 정상회담 합의문에 등장한 표현들을 이해하기 위해 예전 기사들을 찾아보면서 알게된 사실들입니다. 혹시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번 확장억제전략협의체 건은 윤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었기 때문에 인수위 단계에서 국방부 업무 보고에 당연히 이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3월22일자 국방부 업무보고 내용은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를 실질적으로 재가동시키고 이 협의체에서 한반도 위기 고조시 미국 전략자산의 상시 순환배치 또는 전개를 미측과 논의하겠다"라고 돼 있다고 합니다. 국방부가 다시 한번 호기롭게 '상시 순환배치'라는 마의 벽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지요.
이번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은 이같은 국방부의 원안에 바탕해 한미간 협의한 결과를 담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해당 부분의 표현을 보면 한미간 고투의 시간들을 음미해 볼 수 있겠지요. 해당 대목은 다음과 같이 됐습니다.
"양 정상은 가장 빠른 시일 내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를 재가동하기로 합의하였다"라는 문구가 나온 뒤 "양 정상은 북한의 안정에 반하는 행위에 직면하여, 필요 시 미군의 전략자산을 시의적절하고 조율된 방식으로 전개하는 데 대한 미국의 공약과, 이러한 조치들의 확대와 억제력 강화를 위한 새로운 또는 추가적 조치들을 식별해 나가기로 하는 공약을 함께 재확인하였다"라고 돼있습니다. '필요시 미국의 전략자산을 시의적절하고 조율된 방식으로 전개'하겠다.' 뭔가 참 애매하죠? 여태까지 상시배치 정례배치 순환배치 등의 단어를 맴돌다 약간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저 문구를 꺼내지는 않았으리라는 겁니다. 우리 원안은 국방부 업무보고 대로 '상시순환배치나 전개'였을 테니까요. 그런데 역시 이번에도 상시 순환의 높은 벽은 사실 처음부터 쉽지 않았을 테고 정례배치도 순환배치도 아니고 저건 뭘까요? '시의적절하고 조율된 방식'이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번 정상회담 공동성명이 여태까지의 정상회담 합의문과 비교해 앞부분 부터 군사관련 용어들이 마구 튀어나와 뭔가 어마어마한 합의가 있는 거 아닌가라는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실제로는 어떤지 저부터 궁금해서 과거 한미간 군사관련 합의들을 찾아봤지요.
앞부분 내용에 이렇게 군사 관련 용어가 난무하게 된 데에는 매년 10월 열리는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의 해당 부분을 거의 통채로 옮겨놓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찾아본 것은 <제49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 공동성명>(2017년 10월28일자 )전문인데 그중 4항의 골격을 바탕으로 이번 <한미정상 공동성명>의 첫항 '◇평화와 번영의 핵심축'이 작성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국가간 합의에는 늘 반복되는 문구가 있다보니 그럴 수 있다고 보는데 그러다 보니 시차를 두고 특정의 표현이 달라졌으면 왜 달라졌는지 배경이 더욱 궁금해지는 법이지요. 미국 전략자산 운용에 대해 2017년 SCM 문건의 표현은 "양장관은 양국 정상이 합의한 한반도 및 한반도 인근에 대한 미 전략자산의 순환배치 확대와 연계하여, 미 해군 및 공군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빈도 및 강도가 증가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입니다. 어쨌거나 이 당시에는 '순환배치 확대'라는 명확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지요.
2017년의 SCM 성명과 이번 공동성명 내용 중 표현이 달라진 부분이 또 한 곳 눈에 띱니다. 바로 한미연합 훈련과 관련한 대목입니다. 2017년 SCM에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동맹의 대비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연합훈련을 지속 실시해야 하는 필요성을 재확인하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냥 '연합훈련을 지속 실시해야 하는 필요성을 재확인하였다'라고 해도 됐을 것 같은데 굳이 '한반도에서'라고 장소를 국한한 것이 눈에 띱니다.
그런데 이번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는 이 대목이 "북한의 진화하는 위협을 고려하여 양 정상은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의 연합연습 및 훈련의 범위와 규모를 확대하기 위한 협의를 개시하기로 합의하였다"라고 돼 있습니다. 내용이 복잡해졌지요? '북한의 위협을 고려하여'라고 하면서 훈련 장소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그 주변으로까지 확대됐고 훈련의 범위와 규모도 확대하기 위해 협의한다고 합니다. 어떤 상황을 의도하고 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우리 입장에서 굉장히 부담스러운 상황이 될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처음 정상회담 공동성명을 읽었을 때는 반도체나 배터리 등 첨단산업 공급망 부분에서 미국쪽 요구를 들어주고 대신 대북 억지와 관련 해서는 이 정부의 입장을 관철했나 보다는 느낌을 가졌었습니다. 우리 대통령실과 미국 NSC간에 경제안보 관련 핫라인을 구축한다고 했을 때 문재인 정부 시절 한미간 대북정책협의회 같은 것이 연상됐더랬습니다. 한국의 대북 접근을 미국과 일일히 협의해야 하느냐 해서 시끄러웠지요. 어쨌거나 경제안보쪽은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대북 억지력 확보 차원에서는 이쪽의 요구를 관철했겠거니 했는데 과연 그런가요? 확장억제전략협의체 말은 요란한데 미 전략자산 전개나 배치는 큰 방향이 없이 그때그때 협의해야 되고 그대신 한미훈련은 북한의 도발에 대처한다면서 엉뚱하게 한반도 범위를 넘어설 수 있다고 명시를 했습니다. 제 솔직한 느낌은 미국의 노련한 협상술에 걸린 게 아닌가 싶군요.